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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솔 Nov 13. 2022

내 인생은 몇 퍼센트의 거짓이 섞여 있을까?

연민의 감정 사기를 당한 후기

그 친구는 말을 잘한다. 점심에 만나면 저녁까지 폭풍 수다를 떨다 못내 아쉬운 얼굴로 헤어지곤 했다. 그러고는 온라인으로 카톡을 주고받으며 또 주저리주저리 늘어진다. 지금 나누는 대화가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먼저 확인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아 온몸에 암이 퍼져 언제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했으니까.


혹시나 모를 돌발상황을 대비해 그의 사촌 형님이 SNS에서 밤이면 밤마다 진통제를 주입하거나 열이 올라 응급실에 간다는 소식을 전했다. 물론 그런 상태 메시지를 보았으니, 그 친구에게 "힘내, 오늘은 아닐 거야. 우리 내일 꼭 카톡 하자..."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고 불안에 떠는 상태로 잠이 들었다. 이튿날이면 제일 먼저 그 친구가 답장 메시지를 보냈는지, 밤사이 부고라도 뜨지 않았을지 사촌 형님의 상태 메시지를 확인했다. 무사했다. 어젯밤도 다행히 잘 이겨냈다고 한다.


이제는 정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메시지를 올려 지금이라도 볼 수 있을 때 많이 만나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 "그래, 다음 약속을 잡고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많이 챙겨줘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정말 다음번의 만남이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을 졸이는 만남은 석 달 동안 이어졌고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 친구의 수명은 "이제 앞으로 짧으면 한 달, 길면 삼 개월"에서 "짧으면 삼 개월, 길면 육 개월"이라고 말이 바뀌더니 우리가 진실을 파헤친 날에는 "앞으로 삼 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동안 우릴 속였다. 그 친구가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는 사촌 형님의 메시지는 본인이 부계정으로 올린 글이다. 우리와 나눴던 대화도 전부 그 친구 본인이 형인 척 질문하고 답장하고 부탁한 거다.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이 아니라, 우리가 어제까지 직접 겪은 실제 상황이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토요일에 다 같이 모이기로 약속을 잡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이 관계를 마무리해야 하는지 일주일 내내 고민했다. 모든 걸 떠나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거짓이길 바라며 토요일을 기다렸다.


다 같이 둘러앉아 그 친구가 먼저 털어놓기를 바랐다. 여러 번 할 말이 없냐고 기회를 주었지만, 시치미를 뗐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그동안 속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왜 그런 짓을 꾸몄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더니 처음에는 속일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병원에 입원했고 부모님은 바쁘다고, 형들은 공부해야 한다고 돌봐 준 사람이 없어 관심받고 싶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친구들도 병문안 오고 했지만, 병원에서 이유 모를 발열과 멍을 제대로 알아내고자 입원이 길어지고 홀로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외로워 SNS에 글을 올리고 사람들의 응원과 위로, 관심을 받다 보니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는 거다.


지금은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이 맞다고 했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졌다. 그 친구가 백혈병으로 치료 중인 환자가 아니란 걸, 특정 루트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끝까지 거짓말을 하며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 우리도 실망했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을 맺으며 연락처를 차단하기로 했다. 평균 나이가 열 살이나 많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하고 마무리했다.


그 친구가 죄송하다는 말만 두 번 반복했다. 그걸로 모든 죄가 사라질 수 있을까? 우리의 감정을 갖고 놀았던 죄를 떠나 인터넷에서 수많은 팔로워 유저들의 믿음에 대한 값을 환불해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선한 영향을 주겠다며 소아암을 알리려고 노력했던 취지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누군가한테는 더 큰 아픔이 되었는데 무엇으로 치유해 줄 것인가?


진실을 파헤친 날 기준으로 그 친구의 팔로워는 1만 명을 찍었고 우리가 맞팔을 취소하자 이내 팔로워 수가 1만 명 미만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같이 응원했던 다른 지인들께도 이 사실을 알렸으니 팔로워 수가 급격하게 줄었다.


맞팔을 취소하고 단톡방을 나가며 우리의 관계를 정리했다. 오후에는 닫힌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치유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전시회를 보러 갔다. 멋있는 전시였지만, 솔직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멍을 때릴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몸이 나른해졌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밤을 설치고 헛된 인물을 걱정했었나. 그게 전부 가짜라니 너무 허무했다. 아니, 전부 가짜는 아닐 것이다. 친구 말마따나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어 우리가 감쪽같이 속은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끝났으니 다행이다.


다시 SNS를 켜고 그 친구의 계정을 확인해 봤다. 팔로워 수는 여전히 9,000명대이지만, 몇 년 동안 올렸던 피드가 전부 사라졌다. 결국 지우는 길을 택한 걸까? 공개 사과문을 바랐건만, 우리가 전시장에서 마음을 추스르는 사이 그는 증거인멸을 택한 것인가? 사촌 형님 계정은 존재하지 않는 계정으로 뜬다.


"0", 아무것도 없다는 숫자다. 사진도 없고 말 한마디도 남겨 있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0"은 남아 있다. 무의 상태가 되진 못했다.


그의 스토리에는 대체 몇 퍼센트의 진실이 있었을까?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진실이 최대한 많아지기를 바란다. 사랑받지 못해 관심을 받으려던 취지에 시작한 짓이라면 정말 안타까운 사연이다. 그렇다고 딴 사람을 속이는 핑계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나중에 세상을 떠난다면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이 되겠다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그게 언제일지 몰라도 생전에 먼저 빛나는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 흐리멍덩한 빛이 아닌, 진심이 가득한 맑은 빛 말이다.






에필로그:


그 친구가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인데 우리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거라면, 이 부분은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한테 미안한 게 아니라, 이 세상에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을 앓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말이다(물론 그 친구도 정말 이 병을 앓고 있다면 동일하다).


왠지 이 병에 대한 모욕과 오해를 심어주는 이야기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면 사기꾼이라는 인식을 넣어 주게 된 것 같기도 해서 대신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 거 같았다.


아무렴 정말 이 병 때문에 아이를 잃은 부모님이 이번 피해자 중의 한 명이라 더 조심스럽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해주고 눈물을 훔치며 바쁜 와중에도 항상 챙겨주려고 애썼던 사람이니까. 얼마나 화가 나고 짜증이 났을지 상상할 수 없다.


그 친구를 만나 거짓이 섞인 석 달을 보냈지만, 얻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소아암 전공의가 매우 부족하다는 걸 알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얼마나 고된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 듣게 되었다(<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셨다면 꽤 공감하실 듯).


사람이란 생존을 위해 직업을 택하고 그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지만, 남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더 빛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번 생은 의사가 되어 사람을 치료하는 직업을 갖지 못했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아픈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

믿음을 이용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

모두 행복하길 바라는 기도 정도는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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