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 (균형발전평가센터, NAVIS)에 칼럼에 기고한 것입니다.
1. 로컬의 현재
로컬(Local)이 형용사로 쓰일 때는 ‘지역의‘라는 의미다. 단어 자체는 별다른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로컬을 중앙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특히, 정치·경제·문화 등이 수도권에 집중된 우리나라 사정에서는 부정적 이미지가 더욱 커진다. 인구소멸, 경기불황 등 현실과 더해지면 자연스럽게 로컬은 여러 사회문제의 복합체가 된다.
로컬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진행 중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인구감소로 인한 청년 부족, 일자리 감소, 경기침체는 청년들이 로컬을 떠나게 만들고, 이는 다시 수도권 집중화 현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끝이 없어 보이는 로컬의 몰락은 계속될 것인가?
그러나, 모든 일에는 항상 반대급부가 있기 마련이다.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거대한 담론까지는 아니더라도 로컬에서는 다양한 시도와 변화가 꿈틀대고 있다. 로컬에 의한, 로컬을 위한, 로컬만의 움직임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역이 가진 고유의 자원을 발굴하고, 이를 통해 지역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지역에서 청년사업가, 마을활동가, 문화기획자 등의 활동을 하는 그들을 우리는 ’로컬크리에이터‘라고 부른다. 이들은 숨겨진 가능성을 발굴하고 자신의 재능을 더해 사람을 모으고, 경제를 키우며 영향력을 넓혀간다. 지역재생, 마을만들기, 상권활성화 등의 모습으로 로컬은 새롭게 조금씩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2. 로컬의 가능성
로컬에는 많은 자원이 이미 존재한다. 어떤 것은 겉으로 드러나 있어 잘 보이고, 또 어떤 것은 숨어 있어 모르고 지나치기도 한다. 또 어떤 것들은 다른 자원과 조합하면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도 있다. 산과 바다, 강 같은 자연자원이 있고, 문화자원도 있으며, 개성 있는 먹거리와 볼거리 등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로컬문화도 존재한다. 우리는 동일한 대상들을 생각하면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산’을 생각해 보자. 지역에 따라 높이 차이가 있을 뿐, 산은 그냥 산이다. 백두산, 태백산, 한라산, 지리산처럼 고유의 이름이 있고 지역, 계절마다 다른 특색, 위치, 로컬자원이 더해지면 개성이 생긴다. 여기에 사람이라는 변수가 더해지고 교통, 여행, 문화와 브랜딩, 상품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거대한 하나의 우주가 탄생하게 된다. 무궁한 가능성은 커다란 개성으로 이어진다. 로컬자원은 모두 그 지역에만 존재하는 고유의 것이다. 거장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라고 했다. 조금만 다른 시선을 가진다면, 로컬은 창의적인 것으로 가득 찬 곳이 된다. 이제 문제는 이 가능성 넘치는 자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3. 로컬의 한계
로컬에는 한계 역시 뚜렷하다. 현실에서는 이런 아름다운 자연, 고유한 문화, 잠재력 있는 인재, 독특한 로컬 공간 등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사장되거나 잠깐 반짝하다가 이내 사그라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혹은, 서울을 흉내 내는 정도 수준에서 머물기도 한다. 단순히 원도심 활성화를 위해 빈집을 카페로 바꾸고,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한다면 자연스럽게 로컬 활성화가 이루어질까?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증가는 여기에도 적용된다. 지속성을 가지려면 일회성이 아니라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무질서는 자연적으로 증가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침체가 이어질 것이다. 각종 지역재생사업이나 활성화사업이 기간 종료 이후 관리가 안되는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 지속가능성은 단기적이고 즉흥적 시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수요자 중심의 사고가 필요하다. 획일화된 로컬은 또 하나의 표준을 만들어낸다. ‘O리단길’은 이제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다. 유행을 따라서, 트렌드에 맞추다 보면 개성이 없어진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로컬은 정체성을 잃어가고 사람들이 모일 이유가 없어진다. 제품으로 친다면 표준화된 공산품에서 사람들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제로섬 게임이다.
4. 디자인의 새로운 영역
전통적으로 디자인의 대상은 산업문제였다. 제품을 만들고, 심볼을 그렸다. 내용물을 포장하고 홍보를 했으며,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20세기 초 세계적 디자이너였던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 1893~1986)는 디자인의 범위를 ‘입술연지에서 기관차’까지라고 했다. 요즘 개념으로 본다면, 네일아트 제품부터 우주로켓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처럼 디자인은 지금까지 여러 산업 분야에서 활약해 왔다. 그러다 21세기 기술의 발전과 함께 사람의 경험과 감정도 디자인의 영역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4년부터 한국디자인진흥원(KIDP)에서 서비스디자인을 활용해서 행정 정책을 디자인하는 국민디자인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본격적으로 산업문제에서 사회문제로 디자인의 영역이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디자인이 잘하는 영역 몇 가지가 있다. 창의적인 발상, 빠른 프로토타이핑*과 시각화, 수요자 중심의 마인드셋 등이다. 서비스디자인 방법인 더블다이아몬드 프로세스(Double Diamond Process)는 사고의 확산과 수렴을 통해, 이해하기(Understand), 조사하기(Discover), 정의하기(Define), 발전하기(Develop), 전달하기(Deliver)의 과정을 거친다. 이미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행정, 복지, 치안, 정책 과정에 국민이 직접 참여하여 수요자 중심으로 공공서비스 제공 방식을 개선했으며, 현재도 진행형이다. 10여 년 동안 많은 사례로 검증이 된 만큼 로컬 역시 디자인의 새로운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 프로토타이핑: 소프트웨어 시스템이나 컴퓨터 하드웨어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전에 그 타당성의 검증이나 성능 평가를 위해 미리 시험 삼아 만들어 보는 모형제작 방법.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5. 디자인과 로컬의 운명적 만남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로컬은 새로운 기회이자 가능성의 영역이다. 로컬의 개성 강한 자원들은 무궁한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디자인이 잘하는 점을 활용해 디자이너가 참여한 로컬 성공 사례를 국내에서 찾아보자.
많은 지역문제 중에서 한국디자인진흥원의 국민디자인단 사업은 정책 수요자인 국민과 공급자인 공무원, 그리고 서비스디자이너가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제도이다. 특히, 디자이너가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어 기초지자체 단위의 지역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지난 2014년부터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서비스디자인 방법론으로 정책을 만들어가는 프로세스인데, 그 영역이 행정에서 로컬활성화로 확대되고 있다.
기억에 남는 사례로는 2022년 우수사례 중 충남 서천군의 ‘청년농촌보금자리 주택&리틀파머’가 대표적이다.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하고자 국비 40억과 군비 40억을 들여 2007년 폐교인 비인면 비남초등학교 부지를 청년농촌보금자리 주택 29세대로 만들었다. 여기에 수요자 중심의 공동체 지원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서비스디자이너가 핵심 역할을 했다. 디자이너의 창의적이고 수요자 중심적인 서비스디자인 프로세스를 통해 효과적인 인구 유입과 커뮤니티 활성화를 이끌어 냈다.
2023년 경남 거창군은 로컬유학 프로젝트로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농촌학교와 휴양마을,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서비스디자이너는 이런 프로젝트에서 인터뷰, 고객여정맵, 서비스사파리, 서비스 블루프린트, 시나리오 기법 등 다양한 디자인 방법론을 통해 지역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시각화, 실체화하고 있다.
일본의 ‘나오시마’는 섬 지역 내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은행 및 대기업의 적극적인 참여가 눈에 띈다. 일례로, 마스킹테이프(MT)를 제작하는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동네를 아름답게 만드는 벽화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디자이너와 디자인 전공 대학생들의 참여가 이뤄졌다. 페인트보다 테이프를 활용해서 벽화를 제작하는 작업은 비전공자의 손쉬운 참여는 물론이고, 손쉬운 유지보수 및 깨끗한 철거를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디자이너의 참여는 로컬의 문제와 활성화를 위한 정책, 행정, 프로토타입 등의 영역에서 더욱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 수요자 중심의 아이디어를 내고, 정책제안자와 함께 프로세스를 운영하는 방식은 세계 3대 디자인어워드 중 하나인 “IF Design Award 2016”에서 서비스디자인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사례는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해양수산부, 중소벤처기업부 등 중앙정부는 물론, 광역과 기초지자체 등에서도 적극 수용하고 있다. 로컬과 디자인이 결합할 때 얼마나 강력한 변화와 새로운 시도가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6. 로컬과 디자인의 미래
이제 본격적으로 로컬을 위해 디자인을 제안한다.
로컬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터고 모든 것이 디자인의 대상이다. 지금 디자인계에서는 AI가 뜨거운 화두다. 편리한 도구의 탄생이 가져다줄 유토피아를 기대하기도 하고, 한 편에서는 디자인의 좁은 입지를 걱정한다. 디자인이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눈을 돌려 로컬을 바라보자.
로컬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수많은 기회의 보물들이 가득하다. 그것을 찾아내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디자이너에게는 새로운 기회다. 이제는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 로컬과 디자인의 결합은 흔하디흔한 시도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필수적인 움직임이다. 글로벌 시대에 로컬만이 가진 고유함은 강력한 경쟁력이 될 수 있다.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로컬 자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 지역의 특색을 살린 제품, 서비스, 공간 등의 재해석은 디자인을 다시 주인공으로 무대에 세울 수 있다. 이제는 디자인계도 깨어나야 한다. 로컬과 디자인의 결합은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끌 수 있는 강력한 협업 형태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자.
로컬과 디자인의 결합이 우리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기존 시스템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컬 디자이너로서, 로컬크리에이터로서 우리는 함께 혁신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다. 이제는 행동할 때다. 로컬의 시대를 디자인으로 열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