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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름다운 디자인을 원한다

기능주의 디자인을 뛰어넘자

by 송기연

예전부터 궁금해하던 것이 있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결과물은 왜 우리가 하는 디자인과는 달라 보일까 하는 점이었다. 필립 스탁, 카림 라시드, 알렉산드로 멘디니, 하이메 아욘,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 결과물은 오히려 예술 쪽에 가깝게 보였다. 우리도 보다 열심히 해서 유명해지면 디자이너의 철학이나 색깔도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클라이언트의 요구대로 싸고 빠르게 '문제 해결'을 하면 되는 거였다. 많은 사람들도 디자인이 겉만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이 목적이라고 했다. 거기에 디자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도 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디자인에 애써 돈을 쓸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도 발전하고, 인공지능까지 더해지면서 디자인의 궁극적인 역할에 물음표가 생겼다. 크몽같은 곳에서는 디자인 1건에 5만 원짜리도 있다.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문제만 해결하면 디자인의 역할은 끝나는 것일까?

그건 꼭 디자인만의 역할은 아니다. 엔지니어링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산업 영역, 아니 모든 인간 영역의 역할은 문제해결이다. 다만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디자인도 개성 없는 문제해결 영역에 뛰어들어 있는 상태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변별력을 가져야 할까.


겉만 예쁘게 만드는 게 디자인이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럼, 겉은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란 말인가? 아무렇게나 생겨도 기능에만 충실하면 되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제품 역시 눈으로 보이는 이상 겉모습이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디자이너가 스스로 아름다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건 누구의 몫인가? 이는 조형미에 자신 없는 디자이너나 비 디자인전공자들이 만들어낸 레토릭이 아닐까?


알렉산드로 멘디니의 라문 아물레또를 가지고 있다.

2013년에 한국을 방문한 알렉산드로 멘디니가 참여한 행사에서 우연히 경품으로 받았다. 이후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는 왜 이런 아름다운 고가품 디자인을 할 수 없을까. 기능이 아닌 아름다움을 가진, 디자이너의 이름도 함께 알려지는 책임 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안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공학의 절정이라고 하는 독일 3사의 자동차들도 제 나름의 멋과 개성이 흘러넘치는 시대다.


아름다움.

디자인에서는 이 단어가 금기어다. 정해진 숙제를 누가 누가 잘하느냐의 경쟁 같은 디자인 환경에서는 이런 거추장스럽거나 개념 없는 디자이너들이 설 곳은 없다. 하지만 우리도 선진국 경제규모에 이르렀다. 공산품이라고 해도 특정한 디자이너의 DNA가 녹아 있어야 한다. 그런 문화가 조성되지 않는다면 디자이너가 설 곳은 없다. 모두 다 크몽에 저렴하게 맡기면 된다.


K-컬처는 세계적이지만 디자인이 안 되는 이유다.

개인적으로는 언젠가부터 기능주의에 대한 회의가 생기고 있다. 회의라기보다는 그걸 뛰어넘는 디자인을 우리도 가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끼를 먹어도 맛있는 것을 선호하는 시대다. 이제 생활제품들은 풍부하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다. 얼마 전까지 가졌던 '디자인은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야 한다'나 디자인이라는 형식이 내용에 우선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이제 조금은 바뀌었다. 내용과 형식은 상호 보완적이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앞서나가면 밸런스가 무너진다. 그 사이에 디자이너의 DNA가 녹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디자이너의 개성이 제품에서 보일 수 있다.


우리도 이제 그럴만한 자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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