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아주아주 복잡한 행위들의 집합체다
AI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를 기억해 보자.
이 최첨단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말은 신기하다에서 출발해서 기대된다와 무섭다로 나뉘었다가 설마로 마무리되었다. AI가 만들어가는 미래는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일 거라는 전망도 제법 많았던 것 같다. 터미네이터가 현실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농담도 설마로 끝나곤 했다. 그로부터 채 3년 정도가 지나고 보니 어떤가. 생각보다 기술은 가속도를 붙여서 달려 나가고 있고, 창의적인 분야는 절대 AI가 정복하지 못할 거라고 했던 낙관은 산산이 부서졌다. AI가 창조하는 그림, 음악, 글, 생각은 인간의 수준을 일찌감치 뛰어넘었고 여기에 미술, 음악, 디자인 등 소위 창의적인 산업분야의 탄식은 커져갔다. 그래도 그 속에서 한 가지 희망의 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있었지 않은가? 아무리 AI가 발전해도 사람 몸으로 해야 하는 작업은 기계가 하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 이것 역시 쏟아져 나오는 인간형 로봇의 놀라운 움직임을 보고 나니 기가 막힐 뿐이다.
디자인은 확실히 AI에게 정복당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AI로 이미지를 뚝딱 만들어내고, 설계나 창의적 발상도 하고, 영상도 뚝딱 만들어낸다. 그럼 이제 디자인의 미래는 없는 것일까? 이것은 반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디자인 생태계를 잘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은 틀린 말이다. 왜 그런지 주장해 보겠다.
디자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디자인이라고 말하는 이 개념은 멀리서 보면, 창의성이 기반이 되는 어떤 행위다. 독창적이고 상업적으로도 우수한 어떤 개념을 제품으로, 상징으로, 시스템으로, 정책으로 만들어낸다. 기획하고, 표현하며, 실증하는 부분이 디자인의 전부라고 한다면, 맞다. 이제 인간 디자이너는 할 일이,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디자인 처보나 수십 년 경력의 디자이너나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컴퓨터나 프로그램에 능통한 젊은 디자이너가 유리하지 않을까, 아니 디자인을 굳이 전공하지 않아도 AI툴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면 어떤 분야라도 전문가 같은 결과물을 내놓는 일은 어렵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대로 이는 디자인에 대해서 한쪽면만 보고 하는 말이다. 실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디자인"이라는 행위에는 앞서 언급한 기획,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형태, 설계, 실증만 있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의 완성은 끊임없는 소통이 필요하다. 클라이언트, 사용자, 고객과 같은 이해관계자뿐만 아니라 시장, 경쟁자와 같은 조직과 사회, 문화, 환경, 경제 등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소통해야 한다. 디자인이 어렵다고 표현한다면 이런 부분일 것이다. 온라인에서 딱 컴퓨터 작업만을 디자인으로 한정하면 안 된다. 디자인 결과물이 경쟁력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려면 끊임없는 터치포인트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건 AI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람과 소통하고 현장과 교류를 해야 한다. 제품을 하나 만들어도 AI의 영역은 기획과 아트워킹까지다. 이걸 실현하려면 여러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여가 있어야 한다. 재료부터 개발, 생산, 조립, 품질, 후가공 등이 필요하다. 이건 사람의 영역이다. 컴퓨터나 AI만으로 디자인이 완성된다고 하면, 더 이상 대학에서 디자인 전공학과는 필요 없다. 하루아침에 다 없애도 사회는 잘 돌아갈 것이다.
디자인은 늘 산업의 중심에 서고 싶어 했다. 이전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디자인은 없어도 된다. 하지만 있으면 없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을 적용할 것인지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이다. 다은 산업분야와도 마찬가지로 디자인을 하는 환경과 도구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지금은 창의적 결과물을 도출하고 실체화하는데 최고기술의 정점이 AI다. 디자인 분야만큼 이 기술을 잘 활용해야 하는 곳은 많지 않을 것이다. 컴퓨터가 아닌 수작업으로만 작업해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던 시대가 불과 얼마 전이었다.
제대로 된 디자인은 결코 AI가 정복할 수 없다. 하나의 결과물이 시장에 나오기까지 거쳐야 하는 그 수많은 단계와 고민의 과정 중 AI는 상당 부분을 편리하게 해 준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 엉덩이를 떼고 뛰어다녀야 하는 순간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디자인이 AI에게 정복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에 더욱 날개를 달아준다고 봐야 한다. 이제 정말로 누구나 디자인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기초적인 조형감각을 익히고, 아름다운 것을 눈에 담으며, 경제와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디자이너는 확실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빠르게 발전하는 AI에만 기대는 디자이너들은 수많은 사람들 틈에 묻혀버릴 것이 자명하다. 디자인을 하고 있는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이미 결정은 내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