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디자이너의 가치

by 송기연

연륜은 무시 못한다는 표현이 있다.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지식과 자산의 턱이 높아져서 경쟁력이 된다는 말이다.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었던 시절에는 이 논리가 진리로 통했다. 그래서 특정 분야에서 오래 일한 사람의 판단은 신뢰할 수 있었다. 물론 개개인의 경험이나 지식은 상황에 따라서 달랐겠지만 그 정도의 차이는 무시해도 괜찮을 수준이었을 것이다.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1990년대 중반에는 자동차 디자인계에서는 이상적인 사례로 루키 디자이너와 시니어 모델러의 조합을 들었다. 패기 왕성한 젊은 외관 디자이너와 숙련된 경험이 풍부한 (클레이) 모델러가 만나면 이상적인 결과가 나온다는 논리였다. 혈기가 넘치는 스타일링을 양산경험이 풍부한 시니어가 정리하는 식의 조합구성은 아주 멋진 상상이다. IMF가 터지기 전의 사회 분위기는 가능성과 버블의 조합으로 미래에 대한 보랏빛 상상이 주를 이루었다. 세상은 이 정도 수준에서 계속될 줄 알았다. 크게 변하거나 바뀌는 것을 체감하지 못할 정도 수준으로 조금씩 발전할 줄 알았다.


2026년이 밝은 지도 이제 20일이 지났다. 세상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젊은 시절에 상상했던 속도로 변하지 않았다. 시대적 변화를 체감하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겠지만, 실로 빛의 속도로 바뀐다는 진부한 표현을 쓸 정도로 변하고 또 변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진행형이다. 1990년대 중후반에 내가 기대했던 속도 정도만 유지되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의 세상이 되었을까. 나보다 연배가 있는 분들도 젊은 시절 미래를 상상했을 것이다. 젊을 때 힘들게 배운 지식이나 기술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일정 수준의 경지로만 올려놓으면 남은 인생은 보장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기대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더 이상 과거의 풍부한 개인 경험이 지식과 자산으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아니 그보다 더 정확하고 빠른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과거에 힘들게 배운 지식과 기술의 유효기간은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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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역시 마찬가지다. 풍부한 경험을 가진('풍부한'의 정의도 모호하긴 하다) 시니어 디자이너의 식견을 원하는 루키 디자이너는 찾기 어렵다. 예전에 상상했던 그 환상의 조합(루키+시니어)에서 시니어의 자리는 더 이상 없다고 말한다. 그 자리를 최첨단 인공지능의 무한한 정보가 대신한다. 불과 30여 년이 되지 않았지만 과거 시점의 상상은 공상이 되어버린 걸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최첨단 정보산업사회에서 오히려 시니어의 몫은 더 커질 것이고, 풍부한 경험은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다.


디자인을 할 때마다 늘 아쉬운 게 있었다. 누군가 아주 풍부한 경험이나 높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옆에서 의논상대가 되어 줬으면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나 상황을 떠나서 에디슨도, 스티브 잡스도, 하라 켄야도 내 옆에 둘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진심 어린 조언과 생각을 24시간 듣고 심도 깊게 의논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지만 그런 상황이 공평하게 주어졌다 뿐이지 그 혜택까지 모두 동일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옆에 있다고 해서, 완전히 나 스스로가 그처럼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디자인을 하는 동안 무수히 만나게 되는 고민, 갈등, 조사, 선택의 상황에 대화와 의견을 듣고 나누는 것이다. 그는 나를 위한 충실한 윙플레이어다. 내가 20대에 이런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내가 도출할 수 있는 스티브 잡스의 도움은 한정적일 것이다. 뭘 깊이 알아야 대화에도 진전이 있다. 초등학생 옆에 스티브 잡스가 있다고 해서 최고 수준의 디자인을 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아무리 수준 높은 윙플레이어가 있어도, 정작 본인의 전문성이 깊고 넓지 않으면 한계가 존재하는 법이다. 하지만, 루키 디자이너는 하루아침에 시니어 디자이너의 경륜을 체득할 수 없다. 이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무리 정보가 많아도 직접 경험하고 체득한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간접경험이 제아무리 많아도 직접경험을 따라잡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시니어 디자이너의 기회는 이런 곳에서 찾아야 한다.


알아서 물을 수 있다. 인공지능에게 묻는 여러 가지 질문도 실제 일은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정보는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열려 있다. 나에게 유용한 정보를 찾는 방향은 스스로가 정해야 하는데, 이것까지는 아직 인공지능의 영역이 아니다. 이것도 얼마 안 돼서 정복될 영역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충분히 유효하다.


루키나 시니어와의 이상적인 조합의 모델은 아직 유효한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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