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이를 키울 때만 해도 현장학습날 도시락은 엄마들의 몫이었다. 부담스럽기는 해도 그날하루는 새벽밥을 하고,있는 솜씨 없는 솜씨 다 발휘해서 도시락을 싸주었다.
요즘은맞벌이가정이 많아현장학습날 도시락은 어린이집에서 해결해 준다. 가서 사 먹는 원도 있다 하는데 나는 현장학습날에는 55명의 도시락을 싸고 주었다.
도시락메뉴로 볶음밥, 주먹밥, 김밥을해봤는데 김밥이 가장 좋다고 했다. 편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김밥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나는 햄과 단무지에 어묵과 볶은 당근채만넣어 두껍지 않게 만다.거슬리는 식감이 없고볶은 당근채의 단맛이 김밥에 감칠맛을 더해준다.
보통 현장학습은 9시 반쯤 출발하는데 속재료를 볶고 김밥을 마는 시간에 밥 하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늦어도6시엔 나와야 한다. 보조샘 한분도 일찍 나와 돕는다.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며 계획과 준비가 필요한 일정이다.
오후간식을 내보내고 원장이든 원감이든 부연설명을 기다렸다. 일정이 변경되었다면 변경된 과정이 있을 것이다. 미처 전달을 못했다면 미리 전달하지 못해 미안하다는얘기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감수와 발주까지 끝내고 다음날이 휴일인 상황에서 김밥을 싸는 게 가능한지 의논을 해야 했지만 원감은 그 후로 아무 말이 없었다.
저녁준비를 마치고 나와 검수서를 쓰면서 회의를 하고 있는 원장과 원감을 기다렸다. 평소 회의시간을 훌쩍 넘겨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나오지 않았다.
이 무언(無言)의 시간이 어떤 의도처럼 느껴졌다.
회의 중인 교실에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원장과 원감 그리고 6세 반 샘의 시선이 나에게 모아졌다. 말끝자락을 들어보니 회의는 진작에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회의 끝나셨어요? 제가 이제 퇴근해야 돼서요...."
"네,회의다 끝났어요. 퇴근하시게요?"
"네... 근데 금요일에 어떻게 해요? 말씀이 없으셔서..."
나는 원장과 원감을 번갈아 보았다.
"김밥 싸야지요."
원감이 나를 쳐다보지 않고 대답했다.
평소 언어에공을 들이는 사람답지 않게신경질적인 말투였다.
"목요일에 캠프준비도 해야 하는데 금요일에 김밥 싸는 걸 오늘 알려주면 어떻게요. 내일 공휴일인데..... 새벽에 나와 김밥 싸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잖아요."
전후상황을 모르는 샘이 들어도내용을 알 수 있게 나는말했다.
"그래서요?"
쫓기는 사람이 막 다른 길에다다르자 싸울 태세로 돌아서는 모습처럼 원감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내 예상대로 그녀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공개성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내 앞에서 뭣들 하시는 거예요!"
원장의 한마디에 그 자리는 정리되었다.
노트를 챙겨 교사실로 돌아온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 모니터의화면이 이리저리 바뀌고있었지만 그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원감샘이 말한 것 같다던기억 속에선 제가 뭐라 그러던가요? 알았다고 하던가요?"
"그 얘긴 그만하시구요."
"아니요 저는 그 얘기를 해야겠어요. 한두 번아니잖아요. 이런 게....."
그녀는 머릿속에서 생긴 김을 입으로 빼듯 숨을 몰아 쉬며 할 말을 고르고 있는 듯했다.
"저한테 감수서를 보여주지 않으셨잖아요."
그녀가 고르고 고른 말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감수확인서를 봤으면 기억이 나서 미리 알려주었을 것이라는 얘기인가!
도시락을 싸야 하는 현장학습일정을 조리사에게 최소 일주일 전에 알리지 않은 것과 조리사가 감수확인서를 구두로만 알리고 보여주지 않은 걸 대척점이라 생각한 것이다.어지간이 궁색했던 모양이었다.
"원감샘, 지금 무슨 말하시는 것에요?"
"....."
할 말이 없는 건지 할 말을 잃은 건지 그녀는여전히모니터를 응시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