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의 알프스. 무인주유소. 고장난 삐아뜨.
Gazole… Gazole… Gazole…
'가졸'이란 단어로 도배된 소민의 휴대폰 검색창.
휴대폰을 거머쥔 그녀의 양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이 빌어먹을 무인주유소에 주유기라곤 달랑 두 대.
하나는 휘발유 전용. 또 하나는 경유 전용.
그런데 하필 자동차 가득 Gazole을 넣어버린 것이었다.
'가졸'이란 단어가 디젤을, 그러니까 경유를 뜻하는지도 모르고서는.
베이지색 고물 삐아뜨 보닛에 털썩, 주저앉고 마는 소민.
그녀의 인생 40년을 통틀어 가장 난감한 상황이었다.
머리를 굴러본들 묘수가 없었다.
휘발유차에 경유를 넣어버린걸 무슨 수로 되돌린단 말인가!
그 상태로 잠시 굳어져 있었더니만, 몰골이 눈사람이 되어버렸다. 소민의 바다색 털모자도, 빨간 떡볶이 코트도, 심지어 은테 안경마저 폭설에 집어삼켜졌다. 폭설이란 말로는 부족했다. 눈덩이를 양동이째 들이붓는 기분이었으니까.
삐아뜨 운전석 창문이 열렸고, 시동이 안 걸린다고 외치는 쥴리가 눈에 들어왔다.
쥴리. 빠리에 거주 중인, 막내 이모 딸. 소민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사촌동생. 그 애가 차 주인이자 운전자였다.
소민이 말을 더듬는다. 일말의 상의도 없이 휘발유차에 경유를 주입한 일을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도통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콘텍스트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이놈의 무인주유소가 어디 붙어있는지, 그조차 가늠이 안되었으니까.
그녀가 방향치여서가 아니다. 아무리 알프스라지만, 어떻게 된 게 주변이 죄다 산이었다. 폭설을 때려 맞은 설산.
산 넘어 산.
그 너머 또 산.
징글징글할 정도로 산! 산! 산!
인근의 카센터를 검색하려다 사색이 되고 마는 소민의 얼굴.
폭설 탓일까. 휴대폰이 먹통이었다.
눈송이.
또 눈송이.
송이송이 눈꽃송이...
눈꽃 속에서 완전히 멈춰버린, 고물 삐아뜨.
정작 쥴리는 말이 없었다.
달랑 한마디가 전부였다.
'Gazole의 뜻을 몰랐다고? 소민언니, 프랑스어 할 줄 아는 것 아니었어?'라는.
미안하다. 쥴리 너처럼 프랑스어, 한국어, 영어, 다 잘하는 능력자가 못 되어서.
그렇게 머리 숙여 사과해야 했건만.
'어쩐지! 주유 구멍이 잘 안 맞는다 했어!' 따위의, 말 같지도 않은 말밖에는 안 나왔다.
급기야 산 너머로 펼쳐지기 시작한 아찔한 풍경.
해가 지고 있었다.
텅 빈 산간도로에 자동차라고는 없었다.
시동도 걸리지 않는 고물 삐아뜨에 앉아 시간만 축내는 꼴이었다.
답답했다. 여기가 영국이었더라면, 소민이 사는 런던이었더라면, 얘기가 전혀 달랐으리라.
발목까지 오는 시커먼 패딩으로 몸을 꽁꽁 싸맨 채로 덜덜 떨고 있는 사촌동생 쥴리를 소민이 빤히 본다.
쥴리는 짙은 갈색눈에 검은 단발머리였으나, 얼굴 생김이 서양인에 가까웠다. 이모는 한국인이고, 이모부가 프랑스사람이었다.
소민: 좀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오지 그랬어? 그 패딩 그거, 어디 브랜드야? 겉만 번지르르했지, 따듯하지도 않지? 안 되겠다. 스위스 도착하면 옷부터 사자. 그런 얇아 빠진 패딩 말고, 진짜 두툼한 걸로. 내가 한 벌 사줄게.
쥴리:...
소민: 뭘 그런 눈으로 쳐다봐? 왜? 언니가 한 입으로 두 말할 것 같아? 나 그런 사람 아니야. 눈 좀 그치면 분명 다시 될 거야, 휴대폰. 그러면 금방이지, 뭐. 카센터 전화해서 견인차 부르면 여기까지 한 시간 정도면 올라올걸? 가까운 데면 그렇게 오래 안 걸릴 수도 있고.
쥴리: 없어. 그런 거.
소민: 없다니? 뭐가?
쥴리: 카센터.
소민: 그게 무슨 소리야? 카센터가 왜 없어? 아무리 깡시골 촌동네라지만, 카센터가 없다는 게 말이 되니?
열린 차문으로 바람이 마구 들이쳤고, 소민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그새 쥴리는 차밖으로 나가버리고 없었다.
분노에 찬 푸념이, 소민의 혼잣말이 차 안을 울린다.
'내가 멍청한 년이지. 집에 편안하게 늘어져있을걸 가지고는, 뭐 하러 이 소중한 휴가를 여행 따위로 날려버리느냔 말이야.'
소민에게는 실로 간만에 주어진 휴가였다.
그녀는 업계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P 스튜디오 출신으로, 회사를 나온 후에도 프리랜서 특수분장사로 꾸준히 일해왔다. Cold Body 메이크업, 그러니까 시체 분장 분야에 있어서는 그녀의 손기술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특히 올해는 일이 많았다. 내년 개봉을 목표로 한다는 할리우드 좀비영화 프로젝트에 투입된 이후 줄곧 시체 분장만 도맡아 해 온 셈이었으니까.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왜 저런 애랑 여행 같은 걸 가라고 해서는.'
나이 사십을 코 앞에 두고 아직도 엄마 탓이라니.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여행에는 엄마의 지분도 분명 있었다.
아무리 이모의 부탁이라지만, 아무리 사촌지간이라지만, 20년 만에 만나는 사람과 여행이라니!
다섯 살이었나, 열 살이었나? 그때 보고 처음이었다. 양배추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삐삐머리 혼혈아. 그게 소민이 기억하는 쥴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쥴리 쟤가 저렇게 어두운 성격이었나? 어렸을 때는 꽤 명랑했던 것 같은데... 게다가 어떻게 된 애가 배려라고는 없어. 조수석에 앉아있는 나는 배려 안 하느냐고. 빠리에서 여기까지 오는 내내 쥴리 저거, 하루 종일 입 딱 닫고 운전만 했잖아? 사람 안절부절못하게. 진짜 불편해 죽는 줄.'
소민의 넋두리가 스톱된다.
불빛이라고는 없는 칠흑의 어둠 위에 웬 헤드라이트가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차였다.
테슬라 한 대가 멈춘 것이었다.
무인주유소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