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방울. 그녀가 매일 쓰는 가짜가 아닌.
테슬라 뒷좌석이 좌불안석이다. 적어도 소민에게는.
산 아래 카센터까지 태워주겠다는 말에 ‘Merci! Merci!’ 하며 차에 올라탄 것까진 좋았는데.
어색했다. 시트 비닐도 뜯지 않은 신형 테슬라가, 굽이굽이 가파른 산간도로를 살금살금 내려가는 내내.
어차피 창밖은 어둠뿐인 것을. 쥴리는 그 어둠만 바라봤다. 입 한 번을 떼지 않고.
앞자리 운전석에서 빼꼼, 남자가 얼굴을 내비쳤다.
야구모자를 눌러쓴 호리호리한 동양인. 바리톤 저음을 가진.
차에 타기 전, 그는 자신을 프레디라고 소개했었다.
프레디: 저 표지판, 생소하시죠? 스노체인 의무장착구간을 알리는 겁니다. 우리 동네가 원래 그래요. 겨울마다 아발랑쉬로 골치라 도로 곳곳에 저런 걸 세워두죠. 하하...
아발랑쉬라는 게, 산사태 못지않아요. 산사태의 눈 버전? 터지면 순식간이에요. 사람 몇 명 눈에 파묻혀 사망하는 것쯤.
마침 아발랑쉬 경보를 내보내는 라디오방송.
동일한 내용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순서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위스와 국경을 맞댄 지역이라 여러 언어로 방송을 하는 모양이었다.
조수석 가득 쌓인 아마존 배송상자들이 기우뚱거렸고, 소민이 무심코 '조심하세요'라고 프랑스어로 말했다.
그러자 피식, 프레디가 웃는 듯했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소민의 프랑스어를 들은 프랑스 사람 열에 아홉은 웃었으니까. 그녀의 벨기에식 억양이 자기들 귀에 신기하게 들린다나?
소민: 좀 의외네요.
프레디: 뭐가요?
소민: 이 동네 분일 줄은 짐작 못했거든요. 억양도 그렇고, 빠리에서 온 여행자인 줄 알았어요. 우리처럼.
프레디: 원래부터는 아니고요. 살다 보니 이젠 이 동네 사람이 다 되었네요. 하하... 그나저나, 프랑스어는 벨기에에서 배우셨나 봐요?
소민: 티 많이 나죠? 어렸을 때 한동안 살았거든요. 가족 전체가 브뤼셀에서. 언제더라?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프랑스어, 거의 안 써서.
프레디: 어렸을 때 배운 언어를 아직까지 안 잊어버리셨어요? 대단하시다. 언어에 타고난 재능이 있나 봐요.
소민: 재능이라뇨. 재능 같은 게 있었더라면 Gazole 이란 단어쯤은 기억해냈겠죠. 진정한 능력자는 이쪽이에요. 3개국어 가능하거든요. 프랑스어, 한국어, 영어. 그렇지 쥴리?
쥴리를 대화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어림없었다.
창밖의 폭설 저리 가라 급의, 강력한 침묵이 차 안을 지배했다.
침묵을 틈타 소민은 프레디를 관찰한다.
특수분장사라는 직업 탓일까. 자기도 모르게 남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프레디. 전형적인 젠틀맨. 느리지만 또박또박 말을 한다. 몸에 밴듯한 저 차분한 태도 하며.
곤경에 빠진 관광객을 도와준 건 둘째 치더라도...'
그런데, 뜬금없이 한국말이 들려왔다.
프레디가 한국어를 하는 것이었다.
몇 마디 하다 얼른 프랑스어로 되돌아오고 말았지만.
프레디 : 역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부끄럽네요. 평소에 연습을 더 했더라면 좋았을걸.
소민: 울랄라! 한국어 배우셨어요?
프레디: 사실 나도 한국 사람이에요. 걸음마 시작할 나이에 이 동네로 팔려오긴 했지만.
소민: 네?
프레디: 한국인 부모한테서 태어났으니까, 일단 한국 사람 맞는 거죠? 아닌가?... 하긴. 내 한국 이름도 모르는데요, 뭘. 그래도 언젠가 한국 가게 되면 찾아볼 작정이에요. 프레디란 이름은 여기 와서 얻은 거라, 살면서 줄곧 궁금했거든요, 내 한국 이름. 하하...
소민: 그러셨구나...
프레디: 서울 올림픽 때 내가 태어났다던데. 그렇게나 잘 살게 된 이후에도 어린애들을 수출했나 보죠, 한국은?
소민: 글쎄요... 그런 건 저는 잘... 어쨌든 반갑네요. 진짜 반가워요...
프레디: 저도 반가워요. 아!...
프레디의 짤막한 탄식.
차가 급정거를 한다.
바리케이드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제설 작업 표지판과 함께.
작업을 하다 말았는지, 눈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프레디 : 또 시작이네 이거. 하여튼 아발랑쉬 경보만 뜨면 다들 하던 일 내팽개치고 집에 가버리거든요. 도로가 눈에 파묻히든 말든... 어쩌죠? 더는 못 내려갈 텐데... 음...
프레디는 고민하는 듯 보였다.
라디오에서 아발랑쉬 경보가 쉴 새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프레디: 기왕 이렇게 된 거, 목적지를 바꾸시죠. 마을까지 태워다 드릴게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경로라 제법 걸리겠지만, 거긴 숙박시설도 있고.
소민: 마을이요? 이런 깊은 산속에?
프레디: 물론이죠. 이 동네, 리조트도 있는걸요.
소민: 리조트? 이런 깡시골 동네예요?
프레디: 좀 안 어울리긴 하죠? 그나마 지금은 폐쇄 상태예요. 주인이 실종되었다가 시체로 발견되는 바람에.
그때, 불현듯 차문이 열렸다.
쥴리가 훌쩍 차에서 내려버린 것이었다!
이번에도 말 한마디 없이.
/ / / / /
'대체 어딜 가려는 건데!'
'이봐, 쥴리! 거기서 멈추라고!'
'야!!! 멈추라니까!!!'
외침이, 소민의 악다구니가 바람소리에 묻혀버렸다.
당황한 듯한 프레디의 외침 역시도.
헤드라이트가, 프레디가 타고 온 테슬라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제 갈 길 간 모양이었다.
소민과 쥴리를 눈 속에 그냥 두고는.
/ / / / /
소민의 발이 눈 속으로 빠져든다. 티 나게 푹푹.
아발랑쉬 경보가 괜히 발동된 게 아닌 듯싶었다.
눈사람 몰골이 된 쥴리의 어깨를 난폭하게 잡아 세우는 소민의 손.
입에서 미친년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소민: 이런 미친년을 봤나! 너 계속 내 말 씹을 거야?
쥴리:... 놔. 어깨 아파.
소민: 뭐 하자는 건데? 어쩌자고 상의도 없이 혼자 내려? 너 여기가 어딘 줄은 알아?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어?
쥴리: 어차피 난 여기쯤에서 내릴 작정이었거든... 짜증 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딴 차 저거... 됐어... 그만하자...
소민: 저딴 차라고? 넌 예의는 국 끓여 먹었니? 그게 낯선 여행객들 태워준 사람한테 할 소리야? 사람이 왜 이렇게 꼬였어?
쥴리: 언니야말로 뭘 믿고 저걸 얻어 타고 가? 프레디 저 양아치 새끼, 돈자랑이 하고 싶어 안달 난 모양인데, 전기차? 이딴 깡시골에 전기차가 어울리기나 하냐? 샤모니 같은 시내라면 또 모를까, 충전기 하나 제대로 없는 동네에, 전기차는 뭔 놈의 전기차... 됐고. 그만해. 피곤하니까.
소민: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너 프레디랑 아는 사이야? 꼭 아는 사람처럼 말을 하네?
쥴리:...
소민: 야! 대답 안 해? 사람 답답해 뒤지는 꼴 볼 거야, 너?
쥴리:...
소민: 진짜 환장하겠네. 으으... 아니지. 미친년은 나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행을 와가지고서는.
쥴리: 누가 오라고 했어?
소민: 오고 싶어 온 거 아니거든? 너 모르지? 이모가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매일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서 울고불고, 쥴리 너, 약혼자 죽은 다음에 완전 폐인 돼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는다고, 전화도 안되고, 찾아가 문 두들겨도 들은 척도 않고, 그래서 이렇게 아무 죄 없는 나까지 출동을...
쥴리: 씨발!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 말이 소민의 입을 막아버렸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휘발유 차에 경유를 넣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샤모니에 예약해 둔 숙소에서 퐁듀를 즐기고 있을 테니까.
/ / / / /
휴대폰 플래시 불빛에 의지해 얼마나 걸어갔을까.
허허벌판 산등성이가 쥴리의 발자국으로 어지러웠다.
눈.
어둠.
또 발자국. 쥴리의 것임에 틀림없는.
발자국을 쫓던 소민은 문득 불안해진다.
쥴리 얘,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은데... 그런데...
웬 강력한 빛이 느닷없이 등장을 한다.
어디선가 비명이 찡! -
뭐야? 여자 비명이잖아?
...
하지만 쥴리는 아니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순간, 강풍이 그 비명을 꿀꺽 삼켰고, 불빛에 사람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 강력한 빛줄기를 정면으로 맞으며.
남자는 금발이었고, 많아봤자 이십 대 후반 같았다.
나부끼는 눈발 사이로, 그의 손에 철근이...
소민의 눈살이 심하게 찌푸러든다.
철근 끝에서 뭔가 떨어지는 중이었다.
익숙한 뭔가가, 똑... 똑...
그러다 대롱대롱...
핏방울.
소민이 매일같이 사용하는.
아니지.
저건 다르지.
진짜 피잖아! 가짜 피가 아니라!
비명이 이어졌다.
'살인마'라고 외치는 누군가의 비명이 산 전체를 찢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