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엥베뉴, 쁘띠 몽블랑

어서오세요, 철거를 앞둔 리조트에

by 슴샥

하얗다 못해 푸른 눈밭에, 점 하나. 점 둘.

그 점들이 어느새 이어진다.

선이 된다.

핏빛 선.


다시금 밤을 찢는 비명.


“도망쳐! 놈이 그쪽으로 가고 있어!"


누군가 소민을 향해 악을 쓰고 있었다.

조금은 떨어진 거리에서.


소민이 안경을 고쳐 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뚱뚱한 백발 할머니.

할머니의 두툼한 패딩 끝으로 삐져나온, 주름 자글거리는 손가락이 금발의 남자를 가리킨다.

놈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약에 취하기라도 한 걸까? 알아듣지 못할 말을 주절거리면서.


남자가 움켜쥔 철근.

그 끄트머리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눈보라에 섞여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그걸 보며 소민은 엉뚱한 생각을 한다.


'다음번엔 색소 농도, 신경 더 써야겠어. 진짜 피는 저렇게나 점성이 균일하지 않잖아?' 따위의.


직업병이었다. 특수분장사로서의.


어쩌면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냥... 촬영 씬들 중 하나 같았으니까.

허구한 날 보아왔던, 피가 튀고 살점이 뜯겨나가는 씬들.

그래서일까.

철근이 드르륵, 드륵, 눈밭에 끌리는 소리를 내며 가까워오는데도,


"오, 오, 오, 오, 오지 마..."


라고 버벅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소민으로써는.


그때,


' 퍽! '


하는 둔탁한 파열음.

거의 동시에 눈더미 속으로 푹! 처박히는 남자의 금발머리칼.

상반신을 일으키는 듯했으나, 남자는 이내 다시 고꾸라진다. 아니, 눈 속에 처박힌다.

쥴리였다.

쥴리가 놈의 뒤통수를 벽돌로 휘갈겼다. 그리고는,

퍽! 퍽! 퍽!...


남자가 손에 쥐고 있던 철근을 놓치는 장면이 아련하다.

눈보라가, 또 어둠이 소민의 눈을 가렸으므로.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남자를 눈밭에 매다 꽂은 채로 때리는 소리였다.


/ / / / /


그 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쥴리...

양배추 인형을 두 팔 가득 끌어안고는, ‘언니! 언니!’ 귀엽게 쫑알대던 삐삐머리 혼혈아.

그 가녀린 소녀는 더는 없다.

눈앞의 쥴리는 180도 넘는 키에 골격도 컸다.

게다가 프로였다.

금발 남자 목덜미에 손가락을 가져가 맥박 체크를 하는 것부터가.

프로가 맞지.

지금이나 백수지, 엄연히 프로 선수였으니까.

주짓수 종목에 프랑스 대표로 출전해 유럽선수권 메달을 땄다고, 이모가 입이 마르도록 자랑을 했는걸.


굵은 전선 케이블을 왜 줍나 싶었더니, 자신이 기절시킨 남자를 그걸로 결박하는 쥴리.

일대가 쓰레기장이었다. 공사용 폐기물이 만연한.

쓰레기 더미 옆에 아까 그 할머니가 서있었다.

"한방이었어... 무자비하게 철근으로 찌르는데... 피가..."

라고, 치를 떨면서.


할머니의 손전등이 정신 사납게 흔들렸고, 그 불빛이 착지한 자리에 뭔가 보였다.

사람... 손?...


그냥 놔둬도 될 것을.

이놈의 직업병이 또 발동을 한다.


여자 시체. 갈색피부. 피범벅 된 손목에 스마트워치.


그렇게 하나하나 뜯어보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휴대폰까지 꺼낸다.

휴대폰은 여전히 먹통. 얼른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손이 덜덜 떨리는 걸, 간신히 진정시키는 소민.

사진을 찍고는 싶은데, 차마 가까이는 못 가겠고, 최대한 줌으로 찰칵.

플래시까지 터트리며, 한 번 더 찰칵.

기왕 이렇게 된 거, 레퍼런스로 쓸 작정이었다.

피로 도배된 시체 같은 거, 실제로 볼 일이 몇 번이나 있으려나 싶어서.


순간,

“위험해!”

라는 쥴리의 고함소리가 메아리쳤고, '우우우웅' 하는 둔탁한 소리가 뒤따라왔다.


고개를 드니 소민의 머리 위쪽이 온통 절벽이었다.

절벽 중턱에서부터 눈덩이가...

안돼!...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소민이 끌려나간다. 순식간에 몇 미터나 뒤로.

쥴리가 뒤에서 잡아당긴 모양이었다. 대단한 악력으로.

.

.

.


뭘 따지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절벽 경사면에서 둔덕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고,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나무와 바위 같은 것들도 함께 떨어졌는지, 아무튼 눈더미였다.

눈무더기에 완전히 파묻히고 만 것이었다. 소민이 서있던 자리는 물론, 시체가 있던 자리 또한.


쥴리: 멍 때리지 말고, 이리 와서 나 좀 도와줘. 어서.

소민: 뭐, 뭘 하려고...

쥴리: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잖아. 경찰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소민: 너 괘, 괜찮겠어?

쥴리: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도와달라니 도와주긴 했는데...

쥴리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자기가 때려눕혀 기절시킨 남자를, 영차, 가볍게 업어버리는 그 힘이.


소민: 대체 어딜 가려는 건데?

쥴리: 이대로 열한 시 방향으로 쭈욱 걸어갈 거야. 딱 5분만 가면 되거든? 그래도 언덕길이니까, 미끄러울 거야. 오늘 같은 날씨에는 엄청.

소민: 야! 어딜 가느냐니까!

쥴리: 리조트.

소민: 아...


쥴리는 어느새 걸어가기 시작한다.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인데도, 보폭이 일정했다. 눈이라면 익숙한, 익숙하다 못해 이골이 난 사람처럼.

그 뒤를 헐레벌떡 할머니가 뒤따라 갔다.


쥴리: 내 말 듣고는 있어? 소민언니, 정신 바싹 차려야 한다고.


그렇게 외치는 쥴리의 톤에 뭔지 모를 카리스마가 서려있었다.

말대꾸 같은 걸 감히 할 수 조차 없을.


/ / / / /


5분 거리라더니.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쥴리는 힘이 달리는 듯 보였다.

분명 엄청 무거울 텐데. 딱히 도와달란 얘기도 없었다. 방향은 알고나 가는 건지...


금발 남자의 몸이 이따금 들썩거리는 것이 뒤따라 걸어가는 소민에게도 보였다.

남자가 깨어난 건 아닌 듯했고, 쥴리가 업은 자세를 조정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쥴리가 남자를 내려둔다. 숨을 고른다.

눈보라 사이로 흐릿하게 이층 건물이 보인다.

언덕 뒤쪽에 가려져있었던 리조트.

그러나, 말이 리조트였지 평범한 돌집의 외관이었다.

돌을 켜켜이 쌓아 만든 벽. 낮은 경사의 지붕. 발코니 난간이 목재로 둘러싸인 구조의.

‘스위스식 샬레’의 조그만 버전이랄까?

일부러 창마다 나무판자를 박아버린 것도 그렇고, 딱 보기에도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현관 위에 붙은 낡은 플래카드.


Bienvenue, Petit Montblanc


라고 쓰인.

그 플래카드가 눈보라에 위태롭게 나부끼는 모습이 소민의 눈엔 영 찝찝했다.


/ / / / /


현관 앞을 백발이 가로막는다. 살인마란 소릴 서슴지 않고 내뱉던 할머니.

이름이 뭐라더라? ‘애밀리’라고 했던가?

걸어오는 내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던 소민이었다.

쥴리가 그 할머니에게 ‘다친 데는 없으세요, 애밀리?’라고 물었던 장면이 특히 마음에 걸렸다.


소민: 여기죠? 리조트라는 곳?

애밀리: 그래요. 이 근방에 달랑 하나뿐인, 쁘띠 몽블랑 리조트. 지금은 꼴이 저렇지만, 한때는 잘 나갔더랬지. 산악스키 타러 오는 사람들이 리프트를 타고 아랫마을로 오르내리기 좋았거든.

소민: 리프트? 그런 것도 있나요?

애밀리: 뒤로 돌아가면 있어. 있긴 한데... 가만있자... 이게 어디로 갔지?...


주름투성이의 손이 패딩 안주머니로 들어간다.

뒤적뒤적. 뭘 찾는 걸까.


애밀리: 내가 뭐 하러 마을 대표직 같은 걸 떠맡아서는... 이런 날씨에 이 딴 데에서 고생을... 철거 전에 유품이라도 챙겨놓아라, 사람들이 성화를 하는 통에...

참! 그쪽은 쥴리의 사촌이라지? 걸어오면서 얼핏 듣기로는.

소민: 네. 사촌 맞아요. 맞긴한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요. 혹시, 쥴리랑 아는 사이세요?

애밀리: 이 리조트 이거, 다음 주에 완전히 철거될 예정이라우.

소민: 저기요... 그러니까 쥴리랑 어떻게 아는 사이신지...

애밀리: 울랄라! 여기 있었네!


열쇠 같아 보이는 물건이 애밀리의 바지주머니에서 나온다.

그걸 구멍에 넣고 돌리는데, 잘 안 된다.


애밀리: 진작에 마을로 돌아갔어야 하는 건데... 이미 도로가 엉망이라... 제설작업도 때려치우고 집에들 가버린 게지... 그러니 이게 최선이지. 일단 이런데라도 들어가 경찰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어휴...

내가 예상은 했어... 철거 전에는 어떻게든 한 번은 방문할 거라고... 올 거였음 나한테 연락이라도 했어야지! 그래야 내가 직접 올라오질 않지! 안 그렇수?

소민: 네?

애밀리: 그쪽이 한 번 대답해 봐. 정말 아니야? 쥴리 쟤는 어떻게 된 게, 물어도 대답을 해야 말이지.

소민: 아니냐니, 뭐가요?

애밀리: 나처럼 여기 물건들 챙기러 온 것 아니었냐고!

소민: 물건이요?

애밀리: 유품이 남았잖아, 유품! 약혼자의!


그때 쥴리가 다가왔고, 애 밀리는 거짓말처럼 입을 닫아버린다.

‘오래 안 써서 고장이 났나?’ 하는 식으로, 이미 구멍에 넣은 열쇠만 부지런히 돌려댄다.


리조트 문이 열렸고, 오래된 나무 냄새가 스며 나왔다.

그 안쪽의 깊은 어둠 속에서 이상하게도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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