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할 수 없는 진동
사방에서 총구가 자신을 겨누는 듯한, 어딘가 기묘한... 압.박.감.
소름이 돋는 소민.
휴대폰 플래시로 비춰본 벽면은 온통 사냥총 투성이었다.
방 전체가 사냥총으로 빼곡했다.
1차 대전? 아님 그 훨씬 이전?
언젯적 총인지조차 가늠이 어려운 구식 사냥총이었다. 하나같이.
못질로 나무판자를 박아 봉해버린 창문을 눈보라가 마구 두들기고 지난다.
1층 복도는 기역자로 꺾여있었고, 그 끝의 작은 방이 바로 이 방이다.
사냥총 컬렉션을 방불케 하는 '총 방'.
복도를 통과해 문을 발로 차버린 뒤, 기절한 금발 남자를 밀어 넣기까지, 쥴리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리조트 내부를 훤히 꿰고 있는 사람처럼.
낡은 케이블을 고쳐 매 기절해 있는 남자를 더욱 단단히 묶는 쥴리를 소민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본다.
소민: 얘가 정말... 뭐 어쩌려고 그래? 아까는 너무 정신없어서 일단 따라오긴 했는데...
쥴리: 어쩌긴. 기다려야지. 경찰들 올 때까지.
소민: 그래서? 저놈을 이런데 가둬둔다고?
쥴리: 달리 방법 있어? 이 날씨에 바깥에 두면 얼어 죽을게 뻔한데.
소민: 내 말은... 여기 총이 하도 많으니 그러지... 놈이 깨어나서 총이라도 집어드는 날엔...
쥴리: 웃겨. 총알이 없는데, 총이 무슨 소용이라고.
쓸데없는 걱정이라 못 박는 쥴리.
부스럭부스럭, 남자의 파카 안주머니를 마구 뒤진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만 보는 소민.
아까 프레디의 차에서 대차게 뛰쳐나간 쥴리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다 알고 있는 눈치였어. 네비도 없는 데다, 눈보라가 그렇게나 치는데도 한 번 헤매지도 않았잖아? 애초부터 이 리조트로 찾아올 계획이었던 거야, 쥴리 쟤!'
기어이 찾아낸 모양이었다.
쥴리가 면허증을 기절한 남자의 얼굴에 대고 맞춰보는 중이었다.
포르투갈에서 발행한 EU 면허증.
남자의 이름이 고야 (Goya)인 듯했다.
소민: 너 사실대로 말해. 여기 처음 아니지? 애밀리라는 저 할머니랑도 예전부터 아는 사이 맞지?
쥴리:...
소민: 대답해!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말고.
쥴리:... 많이는 아니고. 몇 번 와 봤지... 싹 다 기억하고 있어. 차로 올라오던 길 같은 건 특히나... 그럴 수밖에 없지. 한동안 이 동네 살았으니까.
소민: 뭐? 예전에 이 동네에 살았다고? 그 얘길 왜 이제야 하는 건데?
쥴리: 나한테 물어본 적 없잖아.
소민: 얘 좀 봐... 무슨 말이 그래?... 잠깐. 혹시 그럼... 이 리조트...
쥴리: 맞아. 그 사람 소유였어. K.C.
소민: K.C.?! 그건 죽은 네 약혼자 이름이잖아!
쥴리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것도 같았다.
표정이 전에 없이 덤덤해 보였다.
'프레디가 말했던, 실종되었다 시체로 발견되었다던?'
라고 대놓고 묻고 싶었으나, 소민은 애써 참았다.
꺼내봤자 백해무익한 얘기 같았다.
/ / / / /
한 자락 돌풍이 폐쇄된 리조트를 휘갈기고 지나간다.
쥴리와 둘만 있기 어색해 복도로 걸어 나온 소민.
먹통이 된 휴대폰을 붙들고 경찰에게 신고를 시도하는 애밀리를 뚫어져라 본다.
에디트 피아프가 늙었다면 저런 모습일까?
아니지. 에디트 피아프를 닮았다기엔 풍채가 너무 좋지. 그냥. 머리스타일만 닮은 거야.
그런데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일까?
애밀리가 화를 내고 있었다. 경찰이 오긴 글렀다고. 이런 폭설에 누가 여길 오겠느냐고. 초록 눈동자 가득 분노를 뿜는 중이었다.
그러다 또 혼자 코를 벌름거린다.
어디선가 퐁듀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릴 중얼거리면서.
소민이 휴대폰을 연다.
아까 찍은 시체 사진은 상당히 흔들렸음에도 일정 부분 선명하게 나와있었다.
피범벅이 된 바닥과 공사 폐기물, 그리고 갈색 피부톤의 시체 손목과 스마트워치...
익숙함이 밀려온다.
랜덤한 시체가 아닌, 마치 알고 지낸 듯한... 일종의 친근감?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람. 내가 프랑스에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으나, 일종의 허무감이 밀려온다.
시체 분장을 하도 하다 보니, 진짜 시체가 거부감 없이 느껴지는, 그 사실이 왠지 모르게 서글프달까?
그 생각을 하는데 뒤에서 깜짝 놀라는 소리가 난다.
애밀리였다.
애밀리: 하느님 맙소사! 휴대폰에 그거 뭐야? 시체 사진이야?
소민: 아... 네...
애밀리: 젊은 사람이라 그런가? 도통 겁이 없네. 난 똑바로 쳐다도 못 보겠던데, 그새 사진까지 다 찍었어?
직업병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를 하려 했건만. 말도 채 꺼내기 전에 쏙 들어간다.
애밀리가 망측하다는 식으로, 정확히는 외지인 운운하며 욕을 했다.
영국생활을 포함해 외국생활을 오래 한 편이었으나, 저토록이나 편견을 대놓고 표현하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못 들은 척, 잠자코 있는 게 상책이겠으나, 소민으로써는 호기심이 더 컸다. 입 딱 닫고 있기엔 몸이 근질거렸달까.
소민: 그런데, 죽은 여자 말이에요... 이 마을 사람인가요?
애밀리: 흥! 어림도 없는 소릴!
소민: 어떻게 단정하세요? 사진은 자세히 들여다보시지도 않으셨잖아요.
애밀리: 보고말고 할 것도 없어. 우리 마을에 저런 젊은 여자는 없다구. 여자라고 해봤자 나 같은 노인들 뿐인걸.
죽은 여자가 딱해 그러는 걸까?
애밀리가 난데없이 기도문을 외우는 듯했다. 주름투성이의 손이 성호를 그을 때마다 쑥색의 낡은 패딩점퍼에서 삐직, 삐지직, 마찰음이 났다.
소민: 그렇담 남자는요?
애밀리: 남자? 무슨 남자?
소민: 방에 가둬둔 금발 남자말예요.
애밀리: 지금 그 살인마가 이 동네 사람이냐고 묻는 게야?
애밀리의 톤이 변한다.
가뜩이나 주름이 많은 미간이 확 찌그러지며, 불쾌하다는 티를 대놓고 낸다. 죽은 사람이 불쌍하다며 기도를 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소민: 저는 그냥... 호기심에 물어본 것뿐인데...
애밀리: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지. 쥴리한테 무슨 안 좋은 얘길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살인마가 휘젓고 다니는 동네 아냐, 우리 동네는! 하여간 외지인들은 늘 저렇다니까. 뭘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들 지껄이고 다니면서 헛소문이나 만들어내지. 여기가 얼마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인데, 쯧쯧...
소민: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애밀리: 얘! 어디 네가 한 번 말해봐 봐! 아드리앵! 거기 숨어있지만 말고, 이리 나와서 말 좀 해보라고!
애밀리의 손이 갑작스레 어둠 속을 가리키며 손짓한다.
'아드리앵!' 하면서, 누군가를 몇 번씩이나 부른다.
그러자, 느릿느릿 걸어 나오는 땅딸막한 남자.
살집이 있는 데다, 하얀 패딩을 입어서인지 미쉐린 캐릭터가 연상되었다.
소민: 누, 누구예요, 저 사람? 언제부터 여기와 있었어요?
애밀리: 언제는 언제야. 나랑 계속 같이 다녔는데. 아까 못 봤어?
소민: 진짜요?
순간, 소민이 화들짝 놀란다.
언제 나온 걸까.
쥴리가 옆에 와있었다. 오는 줄도 몰랐거늘.
소민: 쥴리 너, 아까 저 남자 봤어? 저 아드리앵이란 남자말야, 우리랑 같이 걸어왔었어? 그 절벽에서부터?
쥴리: 글쎄... 그랬던 것도 같고...
한껏 미심쩍어하는 소민을 보고 도리어 웃는 쥴리.
아드리앵 같은 건 신경도 안 쓰는 눈치였다.
아드리앵...
그는 행동이 어딘가 굼떴다.
갈색의 스포츠머리를 긁적이는 것도, 눈을 꿈벅거리는 것도, 보통 사람들보다 한 박자 느렸다.
애밀리: 아드리앵! 얼른 이리 와서 이 사진 좀 들여다봐라! 여기 쥴리의 사촌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둔 모양인데, 이 시체가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니냐 묻는다, 글쎄.
아드리앵의 초록 눈동자가 분주하게 왔다 갔다, 휴대폰 속 사진을 들여다본다 싶었는데...
느닷없이 바닥에 토를 한다.
'몰라!'라고, 한껏 도리질을 해대면서.
술을 마신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냅다 구토를 시작한 것이었다.
애밀리: 얘가 또 이러네. 사진은 제대로 확인도 않고는. 얘! 아드리앵! 사진이나 제대로 좀 보라니까!
아드리앵 : 모, 몰라, 그런 거, 나는... 모른다, 모르는 사람... 웁!...
소민: 저 사람, 어디 아픈 거 아녜요? 왜 저러는 거예요?
애밀리: 신경 꺼요. 원래 저런 애니까. 어려서부터 저랬어. 피만 봤다 하면 저렇게 토악질을 하곤 했지. 쟤네집이 르블로숑 치즈로 유명한 농가인데, 일손이 모자라도 쟤한테는 뭘 시키지를 못한다니까. 쯧쯧... 이 밤에 나 혼자 다니긴 뭐해서 데리고 나왔더니, 하나도 도움이 안 되네. 쯧쯧...
그 말에 목소리를 낮추는 쥴리. 소민에게 속삭인다.
'아드리앵 쟤, 동네 바보야. 나름 유명해. 옆동네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라고 당연하다는 듯.
그러나, 쥴리와 제대로 대화할 틈도 없이 애밀리가 끼어든다.
빠리로 돌아간 이후로 전화번호를 바꿨느냐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연락을 일부러 씹었느냐, 등등.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한다.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불안해 저러나 싶다가도, 어떻게 보면 스트레스 해소 중인 것도 같았다.
쥴리가 미리 연락도 없이 죽은 약혼자 유품을 찾으러 온 거라 오해를 하고서는.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난 1년간 쥴리가 애밀리의 연락을 계속 씹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소민: 뭘 단단히 오해를 하셨네요. 쥴리는 일부러 여기 온 게 아니거든요. 저랑 둘이 스위스로 여행 가던 길이었어요. 해지기 전에 샤모니에 예약해 둔 숙소까지 갔어야 하는데, 무인주유소에서 사고, 아니 제 실수가 있어서...
쥴리: 됐어. 굳이 설명할 필요 없어.
소민: 어머, 얘 좀 봐. 뭐가 그래? 오해가 있으면 나서서 풀 던 지 해야...
소민의 말이 갑작스레 멈춘다.
천장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쿵.
쿵.
쿵.
하는,
단단한 무엇인가가 위층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
무시하기 힘든 묵직한 충격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