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무너진 자리에는

수색대. 영화에서나 보던.

by 슴샥

맨 앞은 쥴리, 그 뒤는 소민, 꽁무니에 애밀리.

차례로 걸어 올라간다.

조심조심.


아드리앵은 결국 따라나서지 않았다.

1층 구석에 처박힌 채, '몰라!' 하고 미친 사람처럼 고개만 저었을 뿐.

휴대폰 사진 속 피때문에 쇼크 받은 걸까?

동네 바보라더니. 뭐가 저렇게나 무섭다고.

...


층고는 높았고, 2층 계단에는 냉기가 머물렀다.

흡사 시베리아 벌판...

턱을 덜덜 떨면서도 애밀리는 떠들어댔다.

불안하면 말이 많아지는 타입 같았다.



애밀리: 큰일이야... 어서 경찰을 불러야 하는데, 이건 시도조차 할 수 없으니... 으으...

이 냄새... 라클레르 치즈... 에멘탈 치즈...


소민 : 아까부터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러세요?


애밀리: 그 두 개의 치즈를 섞은 냄새야. 틀림없어. 2층에서 누가 퐁듀를 해 먹은 거라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쥴리가 멈춰 섰다.

손에 쥔 손전등 불빛 역시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다.


빈 와인병이 수두룩.


쓰레기봉투 더미.


그 옆엔 뭐지? 침낭?


게다가 저건... 퐁. 듀. 냄. 비.



...


너나없이 자리에 얼어붙는다.


쥴리가 '쉬잇' 하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조심스럽게 침낭을 들춰본다.


...



하지만 사람은 없었다.


등산배낭 하나가 침낭 속에 처박혀 있었을 뿐.



쥴리: 사람이 살았나 본데?


애밀리: 말도 안 돼! 여기 어떻게 들어오겠어? 열쇠는 줄곧 내가 보관하고 있었는걸.


소민: 문이야 얼마든지 따겠죠. 보나 마나 동네 질 나쁜 틴에이져들이 아지트로 썼을텐데.


애밀리: 그딴 일을 벌일 틴에이져 자체가 없다구. 마을에 남은 젊은이래 봤자 아드리앵 정도지. 그놈도 워낙에 모자란 놈이라 여태 부모집에 사는 것이고.


소민: 외지인 일 가능성도 있잖아요.


애밀리: 외지인이 뭐 하러 이런 데를 찾아와? 설마 관광을 하러? 어림없는 소리. 이 일대는 전부 농가야. 와이너리 농가에 낙농 농가들 하며... 아주 평화로운 동네였다구!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잠시 쥴리의 눈치를 살피는 애밀리. 그러나, 말을 멈출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애밀리: 어쩌다 우리 마을이 그런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서는... 사건 하나 없던 동네가...


쥴리:... 또 나왔네... 그 얘기...


애밀리: 아무튼, 철거 때문에 다녀갔던 인부들도 말했어. 리조트 내부는 텅 비어있더라고. 쥴리 네가 떠난 이후로 어느 누구도 얼씬 않았어...



애밀리가 퐁듀냄비를 가리키며 같은 말을 반복했고, 쥴리 역시 한숨을 쉬었다. 몇 번이나.

그러는 동안 소민은 조심스레 배낭을 열어본다.


아이패드 하나...

노트북 하나...

그리고 묵직한 가죽 파우치...

파우치 안에, 이건 뭐지? 웬 큼지막한 덩어리가?

...

휴대폰 불빛을 비춰보고는 흠칫 놀라는 소민.

의외였다.

파우치 속 물건은 유튜브 다이아 버튼.

천만 구독자를 달성한 채널에 유튜브에서 공식적으로 보내주는.

그녀가 구독 중인 인기 채널들에도 장식처럼 등장했던.

이 사람 누구지?...

누구길래 가방에 이런 걸 가지고 다녀?...

응? 뭔가 익숙한데? 버튼에 새겨진 유튜브 채널명 말야...


소민: 쥴리! 어서 이리 와봐! 와서 이것 좀 보라구!


그때, 무척이나 가깝게 들리는 파열음.


쿵!


쿠웅!


모두가 일순간 얼어붙는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움직인다. 수색대처럼, 또 한 번 재빠르게.


복도 끝까지 한달음에...


...



허공에 먼지가 춤을 추듯 나부끼는 중이었다.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 / /




손전등 빛이 닿았고, 사람 뒷모습이 드러난다.


공사장에서나 쓸 법 한 거대한 해머를 휘두르는, 거구의 남자.


벽은 이미 절반 이상 뜯겨나간 상태였다.


해머의 머리 부분이 벽에 꽂힐 때마다 콘크리트가 비명을 질러댔다.


"멈춰! 당장!"


목청껏 외치는 쥴리.


소리에 반응하듯 돌아보는 남자.


삭발에 몸이 단단하다. 덩치도 그렇고, 얼굴이 축구선수 지단을 닮았다.


노인이라 부르기엔 애매한 나이대. 거기다 술냄새!


얼마나 마셨는지, 술냄새가 일대에 진동을 했다.


"당신 뭐야! 뭔데 리조트를 마음대로 부수고는..."


쥴리의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쿵!!!


하고, 해머가 벽에 꽂힌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그걸 알아챈 걸까. 쥴리가 몸을 낮추어 주짓수 기본자세를 취한다. 여차하면 달려들 수 있도록.


또다시, 쿵!!!


남자의 해머가 비틀, 방향을 튼다.


쥴리 쪽을 향해 쿵!!!


몸을 피했으니 망정이지, 반박자만 늦었어도 머리통이 날아갈 뻔했다.


쥴리의 자세가 더욱 낮아진다. 그와 동시에 손을 뻗는다. 거구의 남자를 향해.


조심해, 쥴리!!!


그러나, 소민의 그 외침이 입안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해머가 포물선을... 쥴리의 머리통을 겨냥해 스윙을...


"그만!"


실루엣이 가로막는다.


애밀리가 뛰어든 것이었다. 쥴리와 거구 사이를.


"나빌! 당신, 나빌 맞지? 아닐 리 없어. 당신 얼굴, 옛날 그대로인걸. 나 모르겠어? 나야, 애밀리! 채플 뒷마당에서부터 마을 묘지까지, 전부 우리 가문 포도밭이었던 거, 기억 안 나?...

내 와이너리. 새로 들여온 포도품종을 맛보고는, 이름을 붙여준 당사자, 바로 당신이었잖아. 그때 당신이 진지한 얼굴로 그랬어.

'Les Orphelins (고아들), 부모 품에서 떨어져 새 땅에 자라난 포도니까, 그 이름이 맞습니다'

난 터무니없다 웃어넘겼는데, 내 남편이 그 이름을 그대로 등록했지.

그 와인, 당시에 제법 팔렸는걸. 와이너리 투어 데리고 오는 가이드가 재미를 붙여서는,

이 와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소설책 제목 같은 이름이 어쩌고, 얼마나 신나게 팔아줬던지...

당신은 늘 그랬어. 포도도 와인도 전부...

아니, 당신 인생 자체가 문학이었지.

오죽했음 식당에 소설책을 잔뜩 놓아뒀을까. 도서관처럼 책이 많았던 식당... 당신이 직접 만들어줬던 쿠스쿠스는 또 어떻고...

아아...

식당 접고 리옹으로 간다고 했을 때, 마을 사람들 모두 응원했어.

그렇잖아? 도시엔 더 많은 기회가 있으니까. 책도 책방도, 문학 모임도...

그땐 예상도 못했지. 이렇게 연락이 끊길 줄은.

당신 딸들이랑 내 딸들이랑 얼마나 친했는지, 알긴 알아? 내 딸들이 엄청 걱정했어.

우편물이 반송되어 오는 걸 보고는 리옹으로 당신 딸들을 찾아가겠다는 소릴 해댔다니까...

당신, 왜 이런데 있어? 다음 주에 폐쇄될 리조트에서 왜 벽이나 부수고 있는 거냐고, 왜!"



믿기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해머가 멈추었으니까.


남자에게서 '애밀리...' 라는 탄식 섞인 이름이 흘러나왔고, 종이가 한 장 허공에 나부낀다.


남자가 웬 종이를 던진 것이었다. 아랍어가 빼곡한.


다음 순간,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자욱한 먼지.


모두의 기침소리.


일말의 탄식.


...


자동차 핸들? 그 핸들이 장난감처럼 느껴질 만큼 웅장한 금속덩어리.


금고였다.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이었으나, 소민의 입 밖으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금고가 확실했다. 그것도 사람키만 한 금고. 전면에 자동차 핸들이 달린.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남자의 입에서 '변호사가 작성한 허가서'라는 프랑스어가 반복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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