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낯익은 목소리
총성 이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추웠으나 춥지 않았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언제 또 총질을 해댈지 모른다는 공포. 상상 속에서의 그 공포에 지배당한 걸까.
소민은 그저 입고 있는 빨간 떡볶이 코트의 후드를 야무지게 뒤집어쓴다.
일층 공용공간의 큼지막한 벽난로. 그 옆에 새 장작이 가득 쌓여있음에도 건드릴 생각조차 않는다.
철거를 앞둔 리조트라 그런지,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난방은 그렇다 쳐도 실내조명마저도. 어둠 속에서 주변을 밝힐 수단이라고는 휴대폰 플래시 불빛과 애밀리가 가지고 온 손전등이 전부인 셈이었다.
그 와중에 애밀리의 코 고는 소리가 참 요란도 했다.
"그날은... 유독 눈이 많이 왔어."
쥴리는 갈색 눈동자를 바닥에 고정한 채 말을 했다.
"폭설도 그런 폭설이 없었지. 절벽이고 뭐고 그냥 다 눈더미였거든. 그러니 구조대원들이 눈을 파헤치는데 오래 걸렸겠지. 처음엔 믿기 힘들더라. 절벽아래 시체가 있는 것 같다는 말. 그런데... 사람 얼굴이 나왔다는 거야. 눈 속에 얼어붙어있는 얼굴. 그게 K.C. 얼굴이라나?..."
어둠 속이었으나 쥴리의 검은색 단발머리가 아래로 푹, 떨구어지는 장면이 소민의 눈에도 보였다.
"예전부터 내가 K.C. 한테 경고했거든. 빙벽에 스크루를 박을 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단단해 보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얼음에 불과하다고. 아마추어가 자칫 빙벽에 갈고리를 잘못 꽂았다가는..."
말이 끊겼다. 그러다 한참 후 중얼거리듯 이어졌지만.
"내 탓이야! 전부 내 탓이라고! 내가 그 메모만 봤어도!..."
내 탓이란 말만 반복해 중얼대는 쥴리.
자동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동네라던가? K.C. 가 당연히 그 동네로 산악스키를 타러 갔을 거라 여겼던 쥴리였다. 그런데...
하필 그 동네에 아발랑쉬가 발생했던 모양이었다. 그랬으니 K.C. 를 찾겠다 그 동네까지 갔던 거겠지. K.C. 가 지척에 있는 줄도 모르고.
안타깝게도 K.C. 는 산악스키를 타러 간 것이 아니었다.
암벽등반을 나간 것이었다. 늘 해오던 루틴대로.
리조트에서 5분 거리의 절벽, 그러니까 뫼르소의 시체가 발견된, 바로 그 절벽으로.
소민: 절벽에서 사고로 그렇게 된 거 맞지?
쥴리: 아님 뭐겠어? 사망원인이 추락으로 인한 골절이라던데.
소민: 내 말은... 네가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같아서.
쥴리: 그래. 내 탓은 아니지. 그리그리 같은 터무니없는 등산장비를 신뢰한 K.C. 잘못이지. 아냐. 애초에 빙벽등반 같은 위험한 스포츠를 취미삼은 것부터가...
쥴리가 헛웃음을 웃었다. 일 년씩이나 지난 일을 가지고서는.
자신의 죄책감이 죽은 사람을 살려낼 리 없단 것쯤 알 텐데도, 과거의 일을 여태 붙들고 놓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K.C. 가 남겨둔 메모.
암벽등반 다녀온다는 내용의.
그 짤막한 메모가 마음에 응어리가 되었달까.
메모를 못 보고는 애먼 곳을 헤집고 다녔던 자기 자신이 용서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쥴리: 절벽에 있다는 걸 어떻게 내가 몰랐을까? 약혼자씩이나 되어서는.
소민: 약혼자가 뭔 상관이야. 부부라한들 마찬가지지. 상대방한테 공개하겠다 결심한 부분, 그 정도만 알고 사는 거지. 상대의 전부를 알 순 없는 노릇이잖아?
쥴리: 이딴 동네에 오는 게 아니었어. 연고도 없는 이딴 시골에 기어들어온다고 할 때 말렸어야 했다고. 리조트고 뭐고...
소민: 이 리조트, K.C. 소유였다면서?
쥴리: 맞아. 친척 누구라더라? K.C. 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거였어. 하지만 리조트 운영 때문만은 아니었어. 사업을 거창하게 벌였거든. 지역회생사업.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사정은 그랬다.
산악스키를 타러 갔겠거니 했던 K.C. 가 연락이 되질 않았다. 하루 이상을.
그런데 타이밍이 나빴달까.
이 동네 낙농 농가 대부분을 끌어들였던 사업이, K.C. 의 주도하에 벌어졌던 바로 그 사업이 하필 좌초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누구 입에서 시작된 루머였을까.
K.C. 가 도망갔다는 헛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마을 사람들이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K.C. 를 사기꾼 취급하는 쪽으로. 투자금을 토해내라는 식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쥴리에게 아우성, 또 아우성.
순진한 시골 사람들을 오트 사업인지 뭔지에 억지로 끌어들였다나. 외지인이 마을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는 식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 그들 논리에 따르자면 K.C. 는 도망자였고, 쥴리는 도망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공범자였다.
'몇 번을 말해! K.C. 는 산악스키를 타러 간 거라니까! 당신들, 산악스키 몰라? 산악스키 그거, 스키장에서 타는 스키랑은 다르잖아. 험한 산기슭의 경사진 비탈, 눈 덮인 곳, 그런 곳만 골라서 스키로 내려오는 거라고! 며칠 연락 안 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들에게 대고 쥴리는 아무 말이나 외쳤다고 한다. 달리 할 말도 없고 해서.
그녀가 뭐라 떠들어댄들, 거짓말쟁이 취급당하는 건 바뀌지 않았겠지만.
/ / /
잠이라도 든 걸까.
움찔, 몸을 떨면서 깨는 소민.
애밀리의 고성이 일층 공간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나가야겠어! 여기 더 있겠다가는, 호흡곤란으로 죽어버릴 거 같다고!"
뭘 하나 싶어 가까이 가봤더니, 애밀리가 바리케이드를 허물어뜨리는 중이었다.
쥴리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태도였다.
애밀리: 퐁듀 포트에서 치즈 쉰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아. 내가 제일 역겨워하는 냄새.
쥴리: 여긴 일층이라고요. 퐁듀 포트는 이층에 있는 물건이고. 설마, 냄새가 여기까지 내려왔다고요?
애밀리: 흥! 내 코가 치즈냄새에 예민해서 그런 거겠지.
쥴리: 억지 부리지 마세요. 도대체 뭘 어쩌시려고 이러세요? 괜히 밖으로 나갔다간...
애밀리: 여긴 안전할 것 같아? 그 사냥총에 총알이 몇 발이나 더 남았는지도 모른다면서. 언제 돌아와 난동을 부릴지, 어떻게 알아?
쥴리:... 고집은 여전하시네. 여기서 얌전히 경찰 기다리면 될 걸 가지고는...
애밀리: 경찰한테서 전화가 왔다니까! 리프트가 작동한다잖아!
애밀리가 고집스럽게 참나무 테이블을 밀었다.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렸다. 라기보다는 출입문으로 나갈 공간을 확보했다. 그러더니만 말릴 틈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초록 눈동자 가득, 불안을 품은 채로.
/ / /
잿빛하늘. 푸르스름한 새벽빛 같기도 하고.
아침이 밝기까지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소민의 은테안경을 눈발이 후려쳤다.
바깥은 눈보라가 어젯밤과는 비교도 안되게 더 심했다.
리조트 뒤로 돌아가면 스키 리프트가 있다더니.
사실이었다. 사실이긴 한데...
몇 걸음이나 앞에 서있는 걸까. 애밀리의 투덜거림이 시끄럽게 메아리친다.
애밀리: 이해할 수가 없네. 상태가 이 모양인데, 리프트를 작동시켰단 얘길 뭐 하러 한 거지? 하여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경찰놈들 같으니라고. 쯧쯧...
쥴리:... 돌아가요.
애밀리: 나빌의 말이 맞았어. 그 무능한 경찰놈들, 사람을 방치하고는 신경도 안 쓰는 거겠지.
쥴리: 돌아가자니까요!
언덕 위에 서있다고 하면 정확할까.
아래가 산비탈이었다. 산비탈을 따라 스키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랫마을로 연결된다나? 바로 그 리프트가.
물론 리프트는 움직이고 있었으나, 시트 상태가 참혹했다. 낡은 플라스틱 조각만 덜렁덜렁.
지나가는 리프트마다 의자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방금 지나간 리프트도, 다가오는 리프트도.
"돌아가는 게 낫겠어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내뱉는 소민.
그와 동시에 애밀리를 잡아끄는 쥴리.
리프트 의자에, 저 낡아빠진 고물 플라스틱에 기어이 엉덩이를 붙여보겠다, 자세를 잡는 애밀리를 뜯어말린다.
당장이라도 꺼질 것만 같았으니까. 안전바도 없는 리프트에 앉는 즉시.
어떻게든 앉았다 쳐도, 몇 미터 못 가 추락할 것만 같았다.
"미쳤어요? 저기 앉는 순간 떨어지는 수가 있어!"
쥴리가 소리쳤다.
그리고 이내 얼어붙었다.
낯익은 목소리...
...
아닐 리가 없었다.
나빌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고 있음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