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하나. 아니, 둘. (하나가 유독 덩치가 큰)
뺨을 휘갈기는 눈발.
그리고 어둠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나빌...
그가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는 중이다. 다 죽여버리겠다는 식으로 바짝 악을 쓰면서.
괴성과 고함. 그것들이 메아리를 만든다.
"리조트로 돌아가자, 소민언니! 어서!"
바람에 실려온 쥴리 목소리.
반사적으로 돌아보는 소민.
그러나 쥴리는 없다. 애밀리 역시도.
그새 리조트로 돌아들 간 모양이었다.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다.
소민은 방향치였다.
미친 눈보라였다. 방향감각 따위, 의미 없게 만드는.
발을 떼는 족족 눈 속으로 빠져들었고, 어딜 향해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허둥지둥, 걷고 또 걸었을 뿐.
그때, 머리 위쪽에서 고성이 터져 나온다.
45 도 각도로 고개를 젖히는 소민.
리프트가 지나간다. 생각보다 느린 속도로.
'저 사람들 완전 정신 나갔어!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면서까지 싸우다니!'
그 순간,
타앙 -
총성이 터져 나온다.
소민의 고개가 휘익, 뒤로 돌아간다.
눈을 뒤집어쓴 리프트 의자 위로 사람 그림자가 하나. 아니, 둘. (하나가 유독 덩치가 큰)
그런데...
그림자 하나가 허공에서 떨어지고 만다.
검은 그림자가 휘청, 그러다 그대로 추락한 것이었다. 스키리프트 아래로.
퍼붓는 눈보라 속에서도 어째 그 장면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 / /
안전바도 없는 스키 리프트에서 삐걱삐걱, 쇳소리가 났다.
리프트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귀를 찢는 총성, 그 폭음이 남긴 이명이 소민을 못살게 굴었을 뿐.
소민이 비명을 삼킨다.
총성. 그리고 추락. 리프트 위에 남아있던 실루엣 하나.
그 실루엣이 누구인지, 그것까진 확인 못했다.
그럴 틈도 없었다. 눈앞의 일이 더 급했으니까.
콘트라스트가 절정에 달한 광경이랄까.
하얀 눈밭에 불그죽죽한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피의 꽃. 나빌의 피로 인해 만들어진.
소민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냉큼 도망부터 친다. 리조트를 향해서.
하지만...
채 열 걸음을 못 가 길을 잃고 만다.
오두막? 혹은 창고?
벽장을 두어 개 붙여놓은 크기의 나무 건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잡동사니를 보관해 두는 곳 같았다.
나무문을 닫자마자 소민은 철퍼덕, 주저앉는다.
심장은 아까부터 통제불능.
총소리에 이어 나빌이 추락했다.
그가 앉아있던 리프트 의자에서 지면까지는 높이 최소 5 미터. 게다가, 피!...
모르긴 몰라도 살아있긴 힘들 것이다.
'아드리앵, 그 미친놈이 기어이 나빌을 죽였구나. 총으로 쏴서? 아님 밀쳐서 추락시켰나?'
생각에 생각이 뒤엉킨다.
머릿속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생전 처음이었다. 사람이 떨어져 죽는 장면을 직접 보는 건.
'경찰! 경찰에 신고부터!'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어 휴대폰을 찾으려던 소민이 멈춘다.
경찰에 연락 한다한들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어젯밤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경찰이었다.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에게 경고라도 하는 걸까.
쾅!
하고, 나무문이 쪼개질 듯 닫힌다.
…
혹시나 하고 기다려 보았으나,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바람이었던 걸까?...
소민이 이를 악문 채 몸을 일으킨다. 문을 닫는다. 그리고는 점프하듯 뛰어오른다.
등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들어오기 전부터 오두막에 이미 다른 누군가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 / /
"아드리앵! 너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아까 그 리프트, 너 아니었어?" , "리프트에 타고 있던 사람, 너 아니었냐고!"
소민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마주친 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아이처럼 울고 있는 아드리앵이었다.
"리프트? 그게 작동이 돼? 언제부터?... 난 어젯밤에 뛰쳐나간 뒤로 숨어 다녀... 이곳으로..."
대답이랍시고 그딴 소리나 지껄이는 아드리앵. 간단한 몇 문장이었으나, 알아듣기 쉽지가 않았다.
한동안 이곳에 숨어있었다는 말 같은데.
소민: 왜 사람들 앞에서 모른다고 잡아뗐어?
아드리앵: 모른다니?...
소민: 뫼르소랑 둘이서 다정한 포즈로 사진까지 찍어놓고서는, 왜 시체 사진을 보고는 모르는 사람이라 거짓말을 했잖아.
아드리앵: 뫼르소가 아니야! 뫼르소 아니라고!
소민: 뭐라는 거야? 그 사진이 뫼르소가 아니라니?
아드리앵: 난 못 봤으니까! 당연히 그건 뫼르소가 아니지!
아드리앵이 고개를 떨어져라 흔든다. 폭풍처럼 울음을 터트린다.
아드리앵: 나빌! 그 악마! 내가 처단할 거야! 뫼르소가 고통당하는 일 없도록!... 불쌍한 뫼르소, 겨울이 시작되기 전부터 리조트에 숨어 지냈지. 그 악마를 피해서. 가엾은 그녀에게 내가 장작을 갖다 줬어. 치즈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랩에 싸줬고, 와인도, 바게트도...
똑같은 말을 주문처럼 반복하는 아드리앵.
그 모습이 뭐랄까, 뫼르소의 죽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말투도 그렇고, 뫼르소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소민은 말이 없어졌다.
동네바보라더니. 사람들이 아드리앵을 그런 별명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딱 봐도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되었다. 뫼르소를 죽이고 아닌 척, 연기를 할만한 위인.
도대체 아드리앵의 말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아이패드 속 사진은, 설마, 뫼르소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 없는 사진 아닐까?
소민: 혹시, 너 어제 뫼르소 만났어?
아드리앵: 아니. 어제는 통화만 했어.
소민: 몇 시쯤?
아드리앵: 몰라. 정확히 기억 안 나. 끊어버렸어. 애밀리한테 들킬까 봐. 애밀리가 치즈 공장으로 나를 찾아왔거든. 리조트로 올라가자면서. 거긴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혼자 가기 싫다고.
소민: 잠깐만. 들킨다고 했어? 뭘 들켜?
아드리앵: 뫼르소가 리조트에 숨어 지낸다는 거. 아무한테도 들키면 안 된다고, 그 남자가 당부했거든. 마을에 알려지면 뫼르소 입장이 곤란해진다고.
소민: 누구? 누가 그런 당부를...
그때,
문이 또다시 벌컥 열렸다.
이번에는 바람 소리 같은 게 아니었다.
사각거리는 발걸음 소리.
눈더미를 힘껏 밟고 걸어오는 사람 발소리.
발소리가 멈추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이 아드리앵의 이름을 부르는.
낮은 음역대의, 바리톤 음역대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