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거짓말.
아발랑쉬경보? 그딴 게 있었다고?
...
창밖만 바라보는 소민.
그녀가 서있는 병실 복도 끝의 창밖 풍경은 아직도 눈에 덮인 채였다.
밖은 줄곧 고요했고, 바람도 잠잠했다.
일대를 집어삼킬 것처럼 몰아치던 폭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완전히 멎어버린 것이었다. 거짓말처럼.
쁘띠몽블랑 리조트에서의 그 밤 이후, 며칠 동안이나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경찰조사? 그래. 조사가 벌어지긴 했었지...'
소민이 고개를 젓는다.
결론이 의외로 빨리 나버렸달까.
아무리 시골 촌구석 동네라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CCTV 가 있었으니까. 그 낡아빠진 CCTV들이 폭설 속에서도 꿋꿋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니까. 이런저런 영상들에 의존해 휘뚜루마뚜루, 조사고 뭐고, 되는대로 끝내버린 모양이었다.
그들이 보여주었던 CCTV 영상들. 폭설 속을 혼자 달리고 있는 뫼르소의 실루엣.
그녀는 알았을까? 결국 죽게 될걸 알면서도 저렇게나 열심히 눈 속을 헤치며 달렸을까?
담당 경찰의 말이 무책임했다. 그 시각 나빌은 술에 취해 쁘띠몽블랑 리조트에 처박혀 있었을 거라나? 절벽 근처 다른 CCTV에 나빌이 포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토대로 그저 짐작하는 것 같았다.
그런 얘기들을 듣고 있으려니, 뫼르소가 가여워졌다.
그녀의 죽음은 추락사로 결론 났다.
평소 폭력을 행사해 왔던, 유튜브로 벌어들인 그 많은 돈을 빼앗아갔던 아버지를, 나빌을 피해 도망치다 그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그리고 동일한 CCTV에 찍힌 또 다른 장면. 드론을 들고 절벽 아래를 헤매는 남자. 고야...
그는 한참을 우왕좌왕했다.
뫼르소 시체를 발견했으면서 신고도 하지 않은 채, 시체 주변만 왔다 갔다. 휴대폰이며 카메라며, 마구잡이로 들이대면서 각도를 바꿨다가, 다시 바꿨다가, 또다시 바꿨다가. 그러다 큰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시체에 박힌 철근을 붙잡고, 힘을 주어 뽑아버리는 꼴이...
그가 철근을 뽑아내는 퍼포먼스 역시,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낡아빠진 CCTV는 물론이거니와 절벽 아래에서 발견된 그의 핸드폰에서도.
고야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살인자가 아니었다. 시체를 훼손한 자였다.
그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현재 고야는 수배 중이다.
/ / /
병실로 들어온 소민.
꽃병에 꽃을 꽂으며 쥴리를 힐끔거린다.
사건이 벌어진 지 일주일도 안된 시간이었지만, 그간 쥴리는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다.
소민: 너 이 꽃 좋아한다면서. 크리스마스 로즈? 이 꽃 별명이 그거라던데?
쥴리:...
소민: 이모가 이 꽃 얘길 하길래. 마침 슈퍼에 있어서 사봤어.
쥴리:...
소민: 자료는 들여다본 거야? 경찰 리포트인지 뭔지.
쥴리는 답이 없었다. 담당 경찰이 두고 간 두툼한 리포트에는 뫼르소가 과거 여러 해에 걸쳐 리옹을 비롯한 프랑스 각지의 은행 지점에서 현금을 인출해 온 사실이 적혀있었다. 그녀가 인출해 온 돈의 총합이 금고에서 나온 돈다발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 역시도. 뫼르소 돈이 틀림없었다. 금고 속의 현금다발은.
소민: 현금이 가장 안전했겠지. 나빌에게서 벗어나 살아가려면.
쥴리:...
소민: 휴... 유튜브 다이아몬드 버튼이면 돈이 얼마야?... 그 많은 돈을 전부 갈취당했다니...
쥴리:...
소민: 왜 아까부터 말이 없어? 너 설마, 아직도 안 믿는 거야? 금고 속 돈이 뫼르소 돈이라는 거?
쥴리: 알아. 나도. 아이저너 베히터 가문의 유산 같은 거,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그런데...
쥴리는 말을 아꼈다.
K.C. 가 빼돌린 돈이 없다는 사실은 이번 수사 과정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그의 죽음 역시도.
작년. 이맘때쯤. 동일한 절벽. 빙벽등반 도중 추락하여 사망.
그 얘기가 경찰들 입에서 몇 차례나 흘러나왔다.
다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 당시의 CCTV 기록이 새롭게 조명되긴 했다.
이를테면, 몸에 등산장비를 착용한 채 절벽에 매달려있는 K.C. 를 향해 절벽 위쪽에서 애밀리가 소리를 지르는 장면 같은 것.
하지만 그뿐이었다. 애밀리가 사업 자금에 관해 소리쳤다는 그 사실이 전부였다.
애밀리는 마냥 소리를 지르다 사라졌을 뿐. 줄을 끊지도, K.C. 를 밀지도 않았다.
소민: 참! 너 잠든 동안 아드리앵이 왔었어. 네 병문안이랍시고 이걸 가져왔던데.
쥴리: 설마... 라클렛 치즈?...
소민: 걔네 집, 치즈 공장을 한다면서? 동네 바보라더니. 절벽에도 치즈를 놔두고 온 모양이야. 뫼르소가 매일 먹던 치즈라면서. 뫼르소를 많이 좋아했었나 봐. 스토커였을까? 그런 거 치고는 꽤 낭만적이지 않아?
쥴리: 모를 일이지.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소민: 확실해. 아드리앵 그 바보, 스토킹 같은 걸 벌일 위인이 못 돼. 스토커라는 단어는 나빌을 피하기 위해서 뫼르소가 둘러댄 말이었을 거야. 안 그래?
쥴리: ... 여긴 왜 자꾸 온데? 아드리앵, 그 바보는...
소민: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서라니까. 예전에 네가 리조트 어딘가 숨겨둔 총알상자? 그걸 자기가 괜히 찾아내는 바람에 일이 이지경이 되었다고. 총알이 없었으면 사냥총이고 뭐고, 쏘지도 못했을 거라고.
쥴리: 나 아니야. K.C. 가 숨겨둔 거지. 총알을 상자 속에.
소민: 그래? K.C. 가 그런 거였어?
쥴리:...
소민: 너 진짜 안 먹을 거야? 이 치즈?
쥴리: 나 원래 치즈 싫어해.
소민: 어머, 프랑스 사람이 치즈를 싫어한다고?
쥴리: 나 프랑스 사람 아니야.
소민: 응?
쥴리: 이방인이었어. 프랑스 사는 내내.
소민: 아...
애밀리 얘기를 꺼내려했는데...
쥴리의 표정을 보니 좋은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다.
애밀리는 체포되었다. 프레디를 찌른 혐의로. 그건 경찰 리포트에도 쓰여있다. 그런데...
연행되는 바로 순간까지 애밀리가 프레디를 향해 막말을 멈추지 않았다는 걸, 쥴리가 알려나?
뭐라더라? 프랑스 욕이 한 바가지 섞여있는 것 같았는데.
외지인? 입양아? 마을을 망치는 존재? 해충?
...
그렇게 치부당한 프레디 본인은 여전히 의식이 없다.
그런 이유로 리프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눈보라, 총성, 몸싸움, 그리고 추락.
그 모든 것은 미궁으로 남아있는 것이었다.
프레디가 깨어난다면 심문이 이어질 예정이라고 했지만.
글쎄.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깨어난다면에 해당되는 얘기다.
/ / /
병실을 나서며 소민은 생각했다.
카르마라는 게 있다면, 이런 걸까?
오랜 세월 프레디를 마을의 골칫거리로 규정해 온 애밀리는 결국 스스로 폭력을 휘두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입양아. 외지인. 마을의 해충.
그 모든 말들이 쌓여 만든 결말.
말 그대로, 카르마.
...
소민이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또 한 번 그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지?... 난 그냥... 휘발유차에 경유를 넣었을 뿐인데...'
창밖 풍경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다.
어쩐지 폭설 같은 건, 내린 적도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