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밭

스며든 마음

by 샤일로

시계를 확인하고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널브러진 종이를 한 곳으로 모으고 가지각색 필기구를 펜꽂이에 넣었다. 어느 정도 정돈된 책상을 보니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언뜻 느껴졌다. 그제야 한동안 배경처럼 있던 다이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루 종일 켜져 있던 천장 조명을 끄고, 침대 머리맡에 있는 램프를 켰다. 흰 냉기가 가시고 금빛 온기로 방 안이 채워졌다. 침대에 기대어 앉아 다이어리를 열었다. 오늘 날짜를 찾기까지 하염없이 넘겨지는 빈 페이지가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흰 공백으로 놓친 순간들이 떠올랐다.


손으로 일기를 쓰는 것이 더 익숙해서 그런지, 그날을 기록하는 일은 마치 밭에 씨앗을 심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러 상황 속에서 움튼 마음을 그저 바람에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밭을 고르고 씨앗을 뿌리듯 하루를 돌아보며 검은 잉크로 흰 종이에 새긴다.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그때의 기억이 더 오래 남기를 바라며 적어 내려간다. 소화하기 힘든 불편한 감정을 종이에 쏟아내기에 바쁜 날도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시간이 지났을 때 오늘의 일이 표면적인 기억에 그치지 않도록, 그 순간 깊었던 마음을 잃고 싶지 않은 바람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종이밭에 스며든 마음은 적절한 계절을 맞이하면 싹을 틔우고 자라기 시작한다. 의식을 마주하며 정제된 언어로 가꾸어 가는 수고로움은 시간이 흘러 또 다른 외부의 자극과 맞닿아 점차 내면의 보호막이 단단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의 움직임이 느껴질 때면, 매일의 시간은 더 선명한 색감, 소리, 질감을 입고 생기가 돋는다.


금빛으로 물든 방 안에서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손길로 하루를 써 내려갔다. 오늘의 감정과 잔상이 이전과 비슷하지만 미세하게 다른 글씨체로 새겨졌다. 마지막 문장의 끝이 맺어지고 펜을 움켜잡은 손을 펼쳤을 때, 종이에 기웃거리던 그림자도 움직임을 멈췄다. 펜촉의 울퉁불퉁한 흔적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날짜 밑으로 심어진 검은 활자들을 마주하니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그리고 맞이한 고요함 속에서 오늘은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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