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고
학부생 시절, 전공강의로 소설 창작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소설의 내용과 주제를 정하는 아이데이션 시간, 불현듯 사람들이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행위가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 다양하고 귀여운 소원들을 어떻게 수리하고 관리할지, 달의 입장을 상상해 소설을 썼다. 합평 시간에 교수님께 이런 코멘트를 받았다. "세상을 참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보는 사람 같네요." 조금 의아했지만 확실히 현실의 비정함을 날카롭게 파악해 이야기로 옮기는 동기들이 있었고, 나는 그쪽과는 멀었으니 이런 평가가 아주 근거 없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소설을 다시 쓸 기회가 생긴 건 두 해 정도 흐르고 참여한 '작문' 스터디 덕분이었다. 방송사 취업을 목적으로 B5 용지 한 장 분량의 단편소설 쓰기를 연습하는 모임이었는데 당시 썼던 글들은 주로 이런 내용이었다. 변이 바이러스의 침투로 감정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 직업이 보다 다양해진 미래에 모 게임회사에서 VR을 활용해 NPC로 일하는 남자의 이야기... 어색했지만 다행히 재미있게 읽어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힘을 내어 썼다. "언니는 참 '디스토피아'를 좋아해." 함께 하던 동생이 내 글을 보고 말했다.
전혀 다른 정서의 이야기를 쓰고, 전혀 다른 평가를 받았던 두 경험 사이에는 2년 반 가량의 공백이 있다. 그 사이에 내게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쓰는 사람의 현재
이야기란, 높은 확률로 쓰는 이의 현재를 담는 것 같다. 과거와 미래를 담는 글도 물론 있겠으나, 그 역시 '과거를 기억하는 나의 현재' 또는 '미래를 꿈꾸는 나의 현재'가 아닐까. 2018년은 다니던 첫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취업을 준비하던 때다. 평소 긍정적인 사람이라 자부했지만 그땐 좀 달랐다. 연이어 불합격 소식이 들렸고, 안 좋은 일도 틈틈이 생겼다. 돋보기를 갖다 댄 것처럼 세상의 부정적인 면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여기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난다한들 겨우 도망치는 건 아닐까? 이런 심리가 게임에서까지 노동을 해야 하는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 걸까. 슬픔도 동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던 건, 영감을 마주한 우연이 아니라 리얼리즘에 기반한 창작이었을까.
나의 이런 가정이 맞다고 한다면(감히 그게 정답이라 확실할 순 없겠지만) 작가 정세랑의 현재는, 참으로 따뜻할 것 같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속 모든 세계에는 '불행'의 요소들이 디테일하게 살아있다. 그중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본다. ⟪리셋⟫속 미래시대는 지렁이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해 이 땅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을 파괴하는 곳이다. ⟪모조 지구 혁명기⟫의 화자는 이름 모를 행성에 납치되어, 지구를 어설피 흉내 낸 테마파크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초능력을 가진 이들을 격리한 수용소가 배경이다.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의 '정윤'은 올림픽 대표를 꿈꿨던 양궁 선수지만, 좀비로 들끓는 세상에서 생존전략부터 세울 수밖에 없다.
다채로운 불행이 있다. 그러나 공통점도 있다. 각각의 불행이 아무리 탈주 불가해 보일지언정, 어딘가에서는 희망이 싹을 틔우고 있다. 인간의 오판으로 인한 부작용 그리고 비극이 도처에 등장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작가 자신도 통사 서술에 가깝게 썼다 밝힌 ⟪리틀 베이비 블루 필⟫에는 특정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인 '알약'이 중심이 되는 구조 덕에 세계의 양면성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3시간 동안 기억력을 강화해주는 이 약 '때문에' 수험 부정행위는 늘었고 끔찍한 고문방법들이 개발된다. 그러나 이 약 '덕분에' 사람들은 서로 사랑했던 순간을 더욱 선명하게 기억한다. 범죄 수사에서도 완벽한 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물을지 모른다. 결국 허구인 비극 속에서 계획된 따뜻함을 찾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대답할 수 있다. 이 이야기들이 대단한 건, 앞단에서 불행을 너무나도 잘 지어 올렸기 때문이다. 비극으로 끝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각 세계의 불행은 촘촘하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인물들이 겪는 부정적 감정은 충분히 납득된다. 그런데도 중간중간 제시되는 따뜻함은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원래 그 자리에 나타나야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것은 결국 쓰는 이의 현재가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서 있는 때문 아닐까. 작품 해설을 맡은 김규림 평론가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 장르문학의 장치를 가져다 쓰면서 비현실적인 장치들을 어색하게 다루는 작가들도 많습니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태어난 세계는 ‘현실’과는 달리 필연적으로 설명하고 묘사해주어야만 하는데, 이를 부담으로 느끼는 작가에게서는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나오지 못하는 거죠. 하지만 이 단편집을 비롯한 정세랑 작가의 작품에서는 그런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꿈과 ‘상상’의 세계가 이 작가의 본진이니까요.’
나는 계속 믿을 수 있을까
재취업을 해낸 후 2년 동안은 지구력에 대한 질문을 쉬지 않았다. 입사는 끝이 아닌 시작이었으므로. 지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최근 내가 내린 답은 이렇다. 결국, 따뜻함을 믿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살아가는 이 이야기의 어딘가에 미약한 따뜻함이나마 남아있다고 믿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지구력을 잃게 되는 것 아닐까. 책과 인생은 또 이렇게나 닮아있는 거라고, 좋은 독서를 통해 새삼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