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울>을 보고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하는 고민을 좀 더 일찍 시작했다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진 않을까? 초등학교 시절 적어낸 장래희망이 단순 호기심에 기반한 게 아니라, 현실적 고민을 통해 떠올린 것이었다면? 중고등학생 무렵부터 성적에 목 매는 대신, 앞으로 뭘 하며 어떻게 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면?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다’고들 하는데, 그게 정말이라면 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먼저 한 뒤 어른이 됐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와서 이렇게 머리를 쥐어뜯고 있진 않을 텐데 말이다.
사실 알고 있다. 이 상상이 현실에서 성취되기 어렵다는 것을. 물론 현명하게도 저 루트를 순서대로 따라온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와 내 주변 사람 대부분이 성인이 된 뒤에야 더 많은 고민을 시작한다. ‘모든 것에 순서가 있다’는 말 만큼이나 자주 쓰이는 게 ‘시간이 지나고야 깨닫는 것이 있다’는 문장이니까. 깨달음의 순간이 언제나 순차적으로 찾아오지는 않으니 말이다.
<소울>의 주인공 미스터 G는 재즈 음악이야말로 자신의 인생 그 자체이며, 유명 뮤지션과 협연하는 순간 자신의 지루한 인생이 순식간에 바뀔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 순간이 찾아오기 직전, 사고로 임사 상태가 된다. 이후 미스터 G의 영혼은 우연히 현생 이전의 세상에서 도착하고 그곳에서 지구에 내려가길 두려워하는 영혼 22번을 만난다. 그와 함께 하며 벌어지는 일들은 미스터 G가 이제껏 믿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목적을 지향하는 삶이 아닌,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이 22번을 만난 뒤 보이기 시작한다. 미스터 G는 지금껏 자신이 믿고 따라온 방향성을 뒤집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디즈니의 과거와 현재
지금의 어른들이 아이였을 무렵, 디즈니는 20~21세기와는 ‘다른 시대’의 꿈 같은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인어공주> 등 비교적 초기작이라 할 작품들은 주로 중세시대 서구권을 배경으로 권선징악의 징후가 뚜렷한 이야기들을 제공했다. 이는 곧 디즈니가 당시 관객들에게 구체적이고 딱 떨어지는 결말과 교훈을 전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픽사 인수 이후 최근작들은 이와 확연히 비교된다. 상상력을 과거 시대의 재현에 사용하는 대신,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사용한다. <인사이드 아웃>의 경우, 인간 개개인의 마음 속 세상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감정’이라는 테마를 통해 소개했다. <코코>는 사후 세계 영역을 가져와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설파했다. 현생 이전의 세계를 다룬 <소울>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는 미처 눈치챌 수 없는 이야기를 현실 밖 시선을 통해 다룸으로써 고민 많은 인생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울림을 전한다.
현실에서 볼 수 없다면, 현실을 '벗어나서' 보자
나는 이것이, 디즈니가 앞으로 시장에서 지위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내린 선택이 아닐까 생각했다. 바쁜 일상 속, 우리가 놓치고야 말았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떠올리게 해주는 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역할이겠으나, 아무리 기술이 좋아지고 실사로도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한들, 애니메이션 만큼 세계관 설정에 자유로운 장르는 아직 없다. 상대적으로 촬영 혹은 구현의 한계가 실사 영화에 비해 적기 때문일 테다. 소재는 고갈될 수 밖에 없고,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공개된 지금 시대에서 디즈니는 뚜렷한 결말 대신 생각할 여지를 제공함으로써 이 지점을 슬기롭게 격파했다.
<소울>을 비롯한 디즈니의 최근작들을 떠올리며,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표현에 대해 생각한다. 주로 ‘어른들이 보아도 유치하지 않고, 생각할 여지를 가득 제공하는 동화’라는 의미가 담긴 채 쓰인다. ‘동화’라는 단어의 뜻풀이를 철저히 한자어에 기대어 실행할 때 가능한 활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들을 청자 혹은 독자로 삼아 만들어졌다는 전제가 오히려 장르를 받아들이는 데에 한계로 작용하는 건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이 표현은, 재평가 받아 마땅하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는, 특정 작품에 붙는 명예로운 수식어가 아니라 좋은 애니메이션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사실 다 커버렸다고 굳게 믿는 우리에겐, 그 무엇보다 동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