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디 Dec 15. 2020

결국 우리는, 어떻게든 달리고 있으므로

넷플릭스에서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를 보고

어릴 때부터 단거리 달리기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 까닭에는 ‘신체적’ 요건보다 ‘성격적’ 요건이 큰 몫을 차지했다. 첫째, 나는 그 누구보다 성격이 급한 아이였다. 뭐든 빨리 끝을 보고 싶었고, 달리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둘째, 호기심이 왕성했다. 지금 달리고 있는 레이스를 가장 먼저 끝마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궁금했다. 이런 마음과 태도가, 겨우 반 평균 언저리 가 닿았을 운동 신경을 가진 나의 신체조건을 초월한 게 아닐까 싶다. 반면 장거리 달리기엔 쥐약이었다. 성격이 급해서 긴 호흡을 못 견뎠다. 호기심이 강했던 것에 비해 지구력이 약해서, 장거리에선 풍경의 끝을 보지 못했다.


학창 시절의 경험들로 자리 잡은 생각이 하나 있다. 운동은 결코 ‘몸’으로만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 생각과 태도가 어떻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결과가 달라지는 게 운동이다. 물론 신체적 요건도 따라주지 못했으므로 전문선수는 꿈꿔본 적도 없지만, 이렇게나마 감히 스포츠의 생리를 예측해보곤 한다. 이런 생각을 꾸준히 하던 차에 넷플릭스에서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를 발견하고, 앉은자리에서 전편을 다 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테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하코네 역전(*일본의 육상 경기 대회로, 총 217.9km 10개 구간을 10명이 교대로 달리는 경기)에 출전하게 된 칸세이 대학 청춘들의 이야기다. 격렬하고 냉혹한 승부를 그리는 여타 스포츠 만화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장거리 이어달리기’가 소재인 탓에 호흡이 유달리 차분하다. 그렇다고 정적인 것은 또 아니다. 오히려 일정한 리듬이 느껴진달까. 달릴 때 들을 수 있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가 연상된다.



주인공들은 전문선수가 아니다. 아마추어 중의 아마추어다. 고등학교 육상부로 활동한 3명 정도를 빼곤 육상 경험조차 없다. 주장인 ‘하이지’가 밑도 끝도 없이 출전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므로, 처음엔 이 도전에 자신들이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부원들은 달리는 행위가 그들 각자의 인생과 얼마나 많이 닮아있는지 실감한다.


시리즈는 크게 두 챕터로 나뉜다. 전반은 하코네 역전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았고, 후반은 실제 경기에 ‘출전’하는 내용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는 ‘카케루’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에 전반부를 투자한다. 카케루는 고등학교 선수 출신으로 달리기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달리기를 그만두려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 다수가 그러하듯, 이 시리즈 역시 비극의 중심에 선 주역이 각성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리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소요한다. 이 지점에 매력을 느끼는 시청자 역시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건, 부원 모두의 이야기가 조금씩 제시되는 후반부였다. 이어달리기 종목의 특성상, 부원들은 경기 때만큼은 ‘홀로’ 달려야 한다. 바로 이때 이 시리즈가 선택한 스토리텔링 방식이 인상적이다. 다름 아닌 개개인의 ‘내레이션’을 활용한다. 한 사람이 배턴을 이어받아 혼자 달리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내레이션을 삽입해 그간 이 도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 보여준다. 동시에 각자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도 함께 제시한다. 이 시퀀스가 빛을 발하는 포인트는 또 있다. 인물들이 우승 혹은 기록 경신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오히려 이번 경기를 끝으로, ‘아름답게’ 달리기와 작별하겠노라 결심하기까지 한다. 그만큼 인물 각각이 다다른 결론은 저마다 다르고 다양하며, 진실하다.



칸세이 대학 육상부원들은 무작정 타인 혹은 과거의 자신과 경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서로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존경하길 마지않는다. 더불어 스스로가 ‘어떤 위치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현실적으로 고민한다. 우승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부담이 다소 적은 아마추어들로 팀을 꾸렸다는 설정이었기에 가능한 서사였다. 그간 다소 ‘명랑해야만 하는’ 장르라 생각했던 스포츠 만화도 얼마든지 현실에 뿌리내린 채 서사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새롭고 좋은 시청 경험이었다.


실제로 달리기는 인생에 관한 격언에 자주 사용되는 소재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든가, ‘자신만의 속도로 달려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생은 이어달리기와 같아서 혼자서는 헤쳐나갈 수 없다’라는 이야기도 들어본 듯하다. 마음 잡고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비유가 한둘이 아니다. 이 비유를 체계적으로 그리고 촘촘히 모아 놓은 작품이 바로 <바람이 불고 있다>가 아닐까. 분명, 인생은 ‘달리기’가 맞다.



"좌우 다리를 번갈아 내밀어라. 그러면 언젠가 골이 온다." -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중에서


*본 글에 삽입된 이미지들은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공식 사이트(일본)에서 가져왔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해결해줄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