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니네 집으로 4
명주도 언니만큼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그녀는 엄마의 무관심과 방임에 쉽게 동화되었고, 아무런 고민 없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 버렸다. 집에 돈이 없다는 건 명백했다. 하지만 돈보다 더 걱정되는 건 엄마의 잦은 병치레였다.
“그깟 공부”
명주는 나중에라도 맘만 먹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일단은 무기력하게 늘어진 엄마에게 밥 한 숟가락이라도 들이미는 게 먼저였다. 엄마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명주는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처음 시작은 동네 식당이었다. 엄마를 잘 아는 주인아줌마가 먼저 명주에게 와서 일 좀 도와달라 손을 내밀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16살의 명주였지만 엄마 대신 집안 살림을 좀 돌봤다고 식당 일은 수월하게 잘 해냈다. 주인아줌마도 이런 명주에게 만족해했고, 돌아가는 길엔 남은 반찬도 넉넉히 싸주곤 했다.
그러던 중 멀지 않은 곳에 큰 봉제 공장이 생겼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몇몇 친구들이 진즉에 그곳에 터를 잡았고, 그중 친한 친구 하나가 그녀를 공장장에게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식당 일에 비하면 진짜 할만해. 술 취한 아저씨들 무섭다며.”
친구는 아직 마음을 못 정한 명주의 손을 잡아끌며 다짜고짜 면접부터 보자고 했다.
워낙 일손이 모자라서였는지 쭈뼛대며 인사하는 명주에게 공장장은 당장 오늘부터 일하라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정식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되었다.
명선은 명주의 회사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월급은 얼마나 받는지, 시간은 어떻게 되는지. 명주는 언니의 이런 관심에 괜히 어깨가 솟았다. 옆에서 엄마도 한몫 거들었다.
“명선이 너는 그 나이에 아직 시집도 안 가고, 공부한다고 돈만 쓰고 있고.”
언니가 없을 때마다 엄마는 명주를 칭찬했다.
“우리 집을 일으켜 세울 사람은 너밖에 없나 보다.”
이제 매달 정해진 날 월급이 나오니, 명주는 일확천금이라도 얻은 듯 뿌듯했다. 하지만 언니는 그녀의 월급 액수를 듣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너도 네 앞가림해야지. 그 돈으로 엄마 약값이나 하겠니?”
명선의 말이 옳았다. 월급은 정말 한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약간 정신을 추스른 엄마가 시장 바닥에 앉아 산에서 캔 나물도 좀 팔며 소일거리를 찾은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기분 따라 나가고 말고 하는 일이라, 언니 말대로 약값이 더 나올 지경이었다. 게다가 명주의 적은 월급을 탓하던 명선도 잊을만하면 찾아와 손을 내밀었다. 그때마다 명선은 진지한 얼굴로 꼭 갚겠다고 말도 안 되는 종이쪽지를 내보였고, 이런 게 차용증이라고 잃어버리지 말라고 명주의 손에 종이쪽지를 쥐어 주었다. 하지만 명주는 언니가 알아서 주겠거니 싶어 그걸 그렇게 차곡차곡 모아 두지 않았다.
명주는 언젠가 언니가 큰 사람이 되면 자신과 엄마를 돌볼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네가 내 대신 고생 많았다. 이제 너도 공부해야지.”
명주는 그런 날을 기다리며 공장에서 하루 종일 밤늦게까지 일했다. 그리고 세월은 하루, 한 달, 일 년, 금방 지나갔고 명주는 유니폼을 벗을 새도 없이 잠들어 버리고 날이 밝기도 전에 겨우 일어나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어느 날 명주는 먼발치에서 보이는 옛 친구들이 고등학교 교복을 벗고 예쁘게 화장하고 나들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날 그녀는 땅바닥이 온몸을 잡아 끄는 듯,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쟤는 나보다 공부도 훨씬 못했는데.”
그녀의 가슴 한쪽이 찌르르 쓰려왔다. 그날 밤, 방 안 구석에 꽂혀 있던 책들을 좀 펼치며, 명주는 쓸데없이 책장 먼지를 손으로 흝어냈다.
“책만 있으면 혼자 공부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