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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Dec 01. 2022

말하고 싶은 비밀: 머릿니

파리 도착과 함께 가방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제 우리 여행의 설렘은 몽실몽실 커져가고, 남은 시간 더욱 알차게 즐길 일만 남았다. 우리는 나라 간 여행이 자유로운 유럽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자동차를 빌렸다.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파리뿐 아니라 다른 도시들도 돌아볼 여유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행 5일 차, 신비로운 섬 같은 몽셍 미셀을 둘러보는데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안 그래도 여행 시작부터 내내 쉬지 않고 돌아다녔더니 피로가 누적되어 오늘은 일찍 호텔로 향하기로 했다. 우리는 15일의 여행 중 파리에서의 4일만 숙소를 예약하고 나머지 일정은 그날그날의 상황에 따라 가까운 곳을 예약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날도 주변을 둘러보다 다소 저렴한 레지던스를 1박 예약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사진보다 많이 허름한 곳이었지만 안쪽 정원에서 바비큐가 가능하다는 점이 맘에 들었고, 우리는 근처 마트에서 사 온 고기를 굽고 와인을 마시며 휴식 같은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체크 아웃을 하며 보니 바이크 부대 아저씨들이 조식을 먹고 있는 게 보인다. 수염도 덥수룩하고 조금 지저분한 일단의 덩치 좋은 아저씨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아마도 다소 저렴한 곳이다 보니 오랜 방랑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인 거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다가오는 큰 시련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옹플뢰르로 향했다. 멋진 요트들이 항구에 즐비하고, 놀이 공원에 온 듯 작고 귀여운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멀리서 보면 소인국을 보는 것 같은 귀여운 도시이다. 우리는 별 다른 목적 없이 동네를 산책하고 점심을 먹은 후 프랑스를 떠나 벨기에로 향했다.

그렇게 차에 올라 꾸벅꾸벅 졸던 아이가 자꾸 머리가 간지럽다고 한다. 아이 머리가 치렁치렁 워낙 길어서 불만이었던 나는 서울 돌아가면 좀 자르라고 면박만 주고 말았다. 그렇게 칭얼대던 아이는 머리를 내 무릎에 얹고 자고, 나는 운전하는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아이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진짜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한 번도 머릿니를 실제로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그것이구나’라는 느낌이 확 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의 머리를 헤집어 봤더니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 아이의 긴 머리를 들출 때마다 벌레가 휘리릭 지나간다. 이 멀고 먼 프랑스까지 와서 머릿니라니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문득 아침에 본 일단의 아저씨들의 긴 수염과 부스스한 머리가 생각나며 이 모든 일의 시작은 그곳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화도 난다.

당장 마음은 급해지지만, 이것 저것 챙겨 온 비상약에 머릿니 약이 있을 리 없다. 우리는 벨기에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동네 약국으로 향했다. 남편은 불어 사전을 검색해 ‘머릿니’를 찾아보고 열심히 발음해 보지만 약사는 알아듣지 못한다. 순간 영어 시간에 쌀의 ‘rice’와 머릿니의 ‘lice’의 발음을 주의해야 한다고 배웠던 기억이 난 내가 ‘lice?’라고 묻자 약사는 단박에 알아듣는다. 우리는 징그러운 머릿니 그림이 그려 있는 샴푸를 받아 들고, 3일에 한 번만 감으라는 주의 사항을 되새기며 호텔로 돌아왔다. 평소 파리, 모기도 무서워하는 아이는 진작부터 울고불고 난리다. 머리가 가려운 이유가 벌레 때문이었다는 걸 눈치채긴 했지만, 샴푸 케이스의 너무나 사실적인 벌레 그림은 아이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우리는 시한폭탄처럼 샴푸를 들고 아이의 머리를 정성스레 감겼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남편과 나도 같은 샴푸로 감고, 옷이나 가방에 벌레가 남아 있을까 걱정되어 호텔 세탁실에서 모든 옷을 빨고 건조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세 가족이 바닥에 앉아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고 있자 하니 무슨 고릴라 가족이 된 듯하다. 서로 등을 보이고 앉아 꼼꼼히 머리를 헤집고 살핀다.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흥얼흥얼 나오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나니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레의 흔적이 없어졌다. 샴푸가 너무 강력했던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머릿니를 달고 다니는 것보다는 괜찮을 거라고 위안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 샴푸는 서울까지 우리를 따라왔다. 혹시라도 남은 이가 부활할까 걱정되어 버리지도 못하고 계속 들고 다니다, 결국 바다 건너 서울까지 수입된 것이다.




긴 유럽 여행을 끝내고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도 머릿니에 관해서만은 이야기하지 못했다. 낭만의 프랑스를 다녀와서 재미있고 신나는 얘기만 하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이가 자기 머리에 그런 게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가끔 그날의 기억을 재미 삼아 이야기한다. 처음 차 안에서 이를 발견하고 손톱으로 눌렀을 때의 그 ‘뽀득’ 하는 소리와 느낌, 호텔의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한가로이 머리를 빗던 평화로운 기억들. 아마 이 상황이 머릿니 입장에선 상당히 피 터지는 생존의 순간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고난과 역경을 가족의 힘으로 이겨 낸 짧은 드라마였다. 그런 승리의 마음으로 이제는 이런 여행기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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