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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Feb 18. 2023

초짜 도둑의 운동화

결혼 전 나는 언니네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엄마가 경기도로 이사하면서 회사 출퇴근이 너무 힘들다는 이유였지만, 남자 친구네가 가깝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나는 몰아서 일하는 불규칙한 회사 스케줄로 조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육아에 힘들어하는 언니를 돕는다는 이유를 보태며 조카들의 성장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4살 된 첫째의 울음보가 터졌다. 언니는 아이를 달래려고 동네 한 바퀴 산책을 나가고 나는 둘째와 집에 남았다. 아마도 언니는 금방 돌아올 생각으로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둘째와 놀고 있는데 갑자기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 둘이 들어왔다. 나는 가스 점검이나 수리 같은 일 때문에 온 사람이려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무슨 일이시냐고 물었다. 


그때, 이들이 나에게 칼을 들이댔다.


그 소름 끼치는 느낌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비명을 지른 것 같다. 내 소리에 놀란 조카는 크게 울기 시작했고, 나는 아이부터 번쩍 안아 들었다. 이제 도둑 한 놈은 나를 지키고 섰고 다른 한 놈은 집 안을 뒤지기 시작한다. 나를 지키고 있던 놈은 아이를 조용히 시키라며 칼을 흔들어 대는데, 자기도 긴장되는지 손을 덜덜 떨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칼에서 시선을 떨구지 못하겠고, 급기야 나도 모르게 ‘아저씨, 그 칼 좀 집어넣어요.’라고 얘기하고 말았다. 어설픈 초보 도둑은 자기도 떨리는 칼이 민망했는지 슬그머니 칼집에 집어넣는다. 다른 한 놈은 집안을 여기저기 뒤지고는 있는데, 쓸데없는 언니의 퀼트 재료 서랍이나 아이 옷장 같은 것만 흩트려 놓고 돈 될 만한 것은 건지지 못하고 있다. 

그때 언니가 돌아왔다. 밖에서 문을 열라며 큰 조카와 장난치는 소리가 들린다. 당황한 도둑들은 없는 척 조용하라고 하지만, 나는 밖에 있는 사람이 아이의 엄마이니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순간 더욱 당황한 도둑들은 차라리 문을 열어 언니와 조카를 집 안으로 들이자고 한다. 그렇게 이들이 문을 열려고 하지만 잠금장치 조합을 맞추지 못한다. 집이 빌라 1층이라 잠금장치를 세 개나 설치했는데, 나도 그 조합을 가끔 헛갈리곤 했으니 이 초보들이 바로 열 리가 없다. 나는 이들이 문 앞에 매달려 애쓰는 사이 조카를 옆구리에 끼고 방으로 달려갔다. 얼른 문을 잠그고 경찰에 신고부터 한다. 마음은 급해 죽겠고 경찰은 자꾸 침착하라고 하는데 나는 밖의 상황이 너무 걱정된다. 결국 경찰과의 전화기를 그냥 열어 둔 채 창문을 열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도둑이야! 00 빌라 102호 도둑이야!’

그렇게 미친 듯이 소리 지다 보니 밖에서 뭔가 우당탕 소리도 나고 언니의 비명이 들리기도 한다. 안 되겠다 싶어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도둑들은 간 데 없고, 문이 활짝 열린 채로 언니가 엎어져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도망치려던 도둑들이 문을 겨우 열었는데, 언니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놈들을 잡으려 했던 것 같다. 뿌리치던 도둑들이 언니를 밀어 넘어지게 했고, 그걸 본 조카는 놀라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뒤늦게 긴장이 풀리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타난 경찰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 눈물 콧물을 쏟으며 상황을 설명해 나갔다. 그렇게 사건을 되짚어 보고 있는데 현관문 앞에 낯선 운동화들이 보인다. 이 초보들이 신발을 신을 새도 없이 맨발로 도망간 것이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초에 도둑질하는 마당에 신발은 왜 벗고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경찰은 그 해진 운동화 두 개를 증거물로 가져가며 그래도 큰 피해가 없어 다행이라 한다. 집 앞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수군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문을 닫았다.


몇 시간 후, 경찰이 용의자를 잡았다며 집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나는 외출 중이라 언니만 있었는데, 경찰이 누구를 데리고 와서 확인해 달라고 했고, 언니는 무서워서 그냥 모르겠다고 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용의자를 피해자의 집에 데리고 와 직접 확인하라고 하는 게 말도 안 되지만, 몇 십 년 전에는 원래 그런 가 했다.




이제 시간도 지나고, 그날 내가 옆구리에 끼고 달렸던 조카는 벌써 군대까지 다녀왔다. 다 큰 아이에게 나는 가끔 그날의 일을 들먹이며 내가 네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색을 낸다. 하지만 그 생과 사를 넘나든 순간, 나는 오히려 그 어린 조카에게 위로를 받았다. 혼자가 아니라 너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도둑들도 혼자는 못하고 둘이 같이 작당을 했을까? 무의식적으로 스며든 예절에 도둑질하는 순간에도 얌전히 신을 벗어 놓고, 자기가 내민 칼이 무서워 손을 벌벌 떨던 그 선한 눈의 도둑들은 자신의 운동화를 찾아 신었을까? 그날 맨발로 혼비백산 도망가며 도둑질은 자기 적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그들이 과거의 실수를 후회하며, 아니 어쩌면 아예 잊고, 건전하고 행복한 삶을 이어 나가고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자신의 정당한 노력으로 산 멋진 신발을 신고 한걸음 한걸음 당당하게 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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