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미젤리 Nov 17. 2022

가방씨, 어디 계세요?

즐거운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내 마음은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1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파리에 도착했고 더욱 들뜨는 마음으로 호텔에서 가방을 여는데,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다. 그건 내 가방이 아니었다.

여행 가방이라는 게 매일 갖고 다니는 물건도 아니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가방을 선반에 얹고 비밀 번호를 맞추려는 순간 내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내 가방은 비밀 번호가 4자리인데 이건 3자리 밖에 안 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000’으로 맞춰 보니 철커덕 열리기까지 한다. 두려운 마음으로 살짝 들춰 보니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신발이 다른 옷가지들과 뒤범벅이 되어 있다. 못 볼 걸 본 듯 화들짝 가방을 닫고 이름표를 살폈다. 가방 주인은 서울이 아닌 멕시코 어디인가에서 온 발음하기 힘든 이름의 소유자이다.  

나는 이번 여행을 위해 정말 많은 것을 준비했다. 패션의 도시 ‘파리’지 않은가? 요일 별, 장소 별 코디를 계획하며 옷과 신발은 물론 스카프와 모자 등 여러 소품들까지 세밀히 챙겨왔다. 그런 나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당장 얼굴에 바를 로션조차 없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 가방을 갖고 있을지 모를 이 지저분한 가방 주인은 나 같이 간절한 마음이 아닐 거 같다는 상상을 하니 분노까지 솟구친다.  아마도 그는 이미 힘든 여정을 끝낸 후라, 가방이 바뀌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으리라.

남편과 아이는 이런 내 마음을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다. 남의 가방을 들고 왔다고 놀리더니, 여행 가이드북과 뮤지엄 티켓 등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나를 타박한다. 남편은 한 술 더 떠서 공항에서 다른 사람의 가방을 들고 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온갖 영화 같은 상상을 줄줄이 읊어 댄다. 국제 마약상이나 테러범들이 세관을 통과하기 위해 일부러 가방을 바꿨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둥, 나쁜 악당들이 가방을 회수하기 위해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위험한 사건, 사고가 줄줄이 이어 질지도 모른다고 반쯤 재미삼아 이야기를 지어낸다.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급해지기만 하고, 내 가방 속 하늘하늘 원피스는 더 멀리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이미 밤은 깊어 오고 나는 급한 마음에 파리 대한항공에 전화해 보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생각 같아서는 바로 공항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서울에서 오는 비행기가 하루 한 편이라 공항 카운터도 오후나 되야 문을 연다고 한다. 그렇게 귀중한 일정의 첫 날을 지저분한 남의 가방을 폭탄처럼 방 한 구석에 세워 놓고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정해진 일정에 따라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다. 나는 급한대로 근처 쇼핑몰에서 산 여행 세트로 기초 화장만 하고 서울에서부터 입고 온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 운동화를 신고 길을 나선다. 남편과 아이는 신나게 떠들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느라 난리지만, 나는 나를 찍고 싶지 않다. 결국 자발적 사진사가 되어 이들을 찍어 주면서도 와이파이만 터졌다 하면 대한항공 홈페이지와 이메일을 확인해 보느라 분주하다. 화려한 궁전과 정원도 나의 눈을 가로막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우울의 장막을 걷어내지 못한다.

그렇게 하루를 급하게 마무리하고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이제 막 업무를 시작한 듯 한산한 카운터 직원에게 상황을 대충 설명하자, 놀랍게도 어제 찾아가지 않은 가방을 유실물 센터로 옮겼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입국장 안으로 안내되었지만, 아이와 남편은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더욱 초조한 마음으로 세관 사무실로 가 한껏 미안한 표정으로 지저분한 남의 가방을 세관에 전달해주며 길고 긴 설명과 서류 작성을 끝냈고, 진짜 내 것을 찾기 위한 또 다른 길고 긴 설명과 서류 작성을 마쳤다. 이제 나는 아무도 없는 컨베이어 벨트 주변에서 혼자 외로이 가방을 기다린다. 그렇게 30분도 넘게 기다렸을까? 드디어 조용하던 벨트가 돌기 시작하더니 컴컴한 입구 쪽에서 내 가방이 불쑥 튀어나온다. 마치 마술사의 모자에서 튀어나온 비둘기나 토끼처럼 내 가방도 펄쩍 날아올랐다. 나는 몇 십 년 만에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듯 벅찬 마음으로 가방을 찾아 개선 장군처럼 입국장을 나섰다.




그날 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가방을 열고 패션쇼를 펼쳤다. 아이와 남편 모두 나의 가방 싸기 실력에 놀랄 정도로 끊임없이 뭔가 튀어나왔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물건을 펼쳐 나갔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정말로 좋아했던 것은 이틀 동안 가방에서 푹푹 익어 버린 포장 김치와 라면과 햇반이었다. 우리는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서 그렇다는 핑계로 그 늦은 밤에 햇반에 김과 김치를 곁들여 맛있는 야식을 먹었다. 그제야 한 마음 한 뜻으로 가방을 찾아서 다행이라는 둥, 이렇게 중요한 것들이 안에 있었으니 내가 울 만도 했다는 둥 위로를 해준다.  

방 한가운데 떡하니 펼쳐진 내 가방도 낯선 곳에서의 방황을 끝내고 진정한 여행을 만끽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공항에서 혼자 외로운 밤을 지새면서도 내가 어떻게든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있었으리라.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나의 진짜 여행은 내일부터 시작이다!





작가의 이전글 갤러리 둘레를 걷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