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딸과 밥을 먹는데 이상한 전화가 왔다. 딱 들어도 무슨 개그 프로그램에 나올 것 같은 중국 억양의 사람이었고 나는 보이스 피싱을 확신했다. 자신이 ‘중앙지검’ 김 무슨 검사라고 하는데, ‘중앙’이라는 발음이 ‘종앙’으로 들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저씨 저를 따라 해보세요. 중앙. 종앙이 아니고 중앙.’이라고 했더니, 또 이 어리바리한 사람이 나를 따라 열심히 발음해 본다. 딸이 옆에서 뭐 하는 거냐고 눈치를 줘서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번 일은 다행히 어설픈 사람이라 넘어갔지만, 보이스 피싱 사기는 갈수록 교묘해지고 일상화되고 있다. 이런 사기 전화를 못 받아 본 사람이 드물 정도이고, 이들은 내 이름은 물론 전화번호, 가족 정보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주로 중국발 피싱범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몇 십 년 전에는 국내에도 이런 나쁜 인간들이 많았다. 그렇게 내가 처음 목격한 피싱 사기는 20년도 더 전이다.
점심시간이었다. 동료들 몇 명이 음식을 주문해 회의실에서 먹으며 한가로이 수다 중이었다.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회의실 밖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고, A가 받으러 나갔다. 평소보다 좀 오래 걸린다 싶었지만 어쨌든 A는 돌아왔고, 우리는 거의 식사를 끝낸 상태였다. A는 어느 상무의 조카라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였다며, 별 것 아닌 것 같은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조카라는 사람은 해외 유학 중이다가 지금 귀국하는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떤 물품이 세관에 걸려서 공항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다며 상무와 통화를 원했다. 스마트폰은 아니라도 핸드폰은 모두 있던 시절이지만, 점심 미팅 중인 상무에게 바로 전화하기는 좀 어려웠다. A는 대신 문자를 남겨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조카라는 남자는 지금 전화도 공중전화에서 겨우 허락받고 거는 거라며 세관을 빠져나가려면 보증금이 필요한데 자기가 한국돈이 없어서 곤란한 지경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말 예의 바른 목소리로 혹시 30만 원만 송금해 줄 수 있을지 조심스레 물었다고도 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우리 사무실로 와서 갚을 수 있고, 그전에 상무가 돌아오면 바로 돈을 내주실 거라고도 했다. A의 말로는 그 조카의 말투가 너무나 친절했고, 정말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다고 했다. 결국 A는 돈을 송금해 주었다. 그런 복잡한 상황을 끝내고 돌아온 A의 이야기에 또 다른 직원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바로 며칠 전 같은 전화가 자기 부서로도 왔다며, 다행히 그 피싱범이 찾는 사람이 사무실에 있어서 아무도 속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회사 조직도라던가 내선 전화번호 같은 게 여기저기 공개되던 시절이라 이 사기범이 직원들의 이름과 직함을 아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뒤늦게 은행으로 전화를 해 지급 정지를 신청했다. 보이스 피싱이라는 말 자체도 없던 시절, 이미 보낸 돈은 수취인이 확실한 경우 다시 되돌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발 빠른 피싱범은 이미 돈을 인출하고 난 후였다. A는 울고 불고 사정을 해 해당 계좌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개인 정보 보호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해당 번호로 전화해 따지니, 이상하게도 계좌주는 꽃집 주인이었다. 꽃집 아줌마 말로는 어떤 남자가 꽃다발을 하나 주문하면서, 본인이 지금 현금이 없으니 계좌 번호를 알려주면 그쪽으로 입금해 드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꽃다발비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와서 나머지는 현금으로 인출해 주었다고도 했다. 갈수록 오리무중이었다. 당시 계약직이었던 그 직원의 월급을 생각하면 30만 원은 상당히 큰돈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 창피했던 A는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고 한동안 속앓이만 했다.
그 이후로 회사 유선 전화로 이런 류의 사기범들의 전화가 간간이 이어졌다. 당시는 사내에서 메신저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걸 해킹해 친구인 척, 부모인 척 돈을 요구하는 사례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재간에 순간적으로 속아서 몇 십만 원을 송금해 주었다는 실수담도 떠돌았다.
피싱범들의 수법이 날로 교활해지니 예전의 사례는 구닥다리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돈은 정정당당하게 벌어야지, 누군가를 속이고 등쳐먹는 행동은 근절되어야 한다. 사기범들이 그 좋은 머리를 이런데 낭비하고 있는 것도 속 터지는 일이지만, 피해자들이 이들에게 속은 것에 대해 자책하는 상황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