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미젤리 Aug 17. 2023

이탈리아 여행기 2

양말과 누더기

이탈리아 패키지 여행 중 한식을 매일 먹었다. 원래 여행의 불편함과 낯설음의 이유는 현지 음식인데, 이상하게도 이탈리아의 한식은 더 낯설고 불편했다.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테이블을 빈틈없이 채워 앉으라는 압박에 매번 다른 사람들과 겸상을 해야 하는 것도 많이 불편했다. 워낙 먹는 게 느린 딸은 배불리 먹기도 전 다른 사람들에 맞춰 숟가락을 내려놓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러니 밤에 호텔로 들어가면 배가 출출할 수 밖에. 결국 너무 배고팠던 어느 날 징징대는 딸과 함께 호텔 식당에 내려가 보았다. 메뉴는 모두 이탈리아어, 당연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는 번역앱이 있다. 


정확히 24년 전 친구와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는 핸드폰이고 인터넷이고 그 어떤 디지털 기기 하나 없었다. 단지 우리가 손에 들고 있던 건 두꺼운 여행 책자 하나. 길을 찾을 때나 식당에서 주문할 때마다 좌충우돌했지만, 어떻게든 볼 건 다 보았고 이탈리아의 음식은 다 맛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네치아의 한 식당에서 Acciughe 피자를 주문했다. 매번 메뉴 판 맨 위 피자만 주문하다 그냥 아무거나 한 번 시켜본 거였는데, 음식을 받고 보니 이게 멸치 피자였다. 우리나라처럼 자잘한 멸치가 아니라 엄청 큰 멸치가 부채처럼 펼쳐 토핑이 되어 있고, 멸치 특유의 비린내도 났다. 아무거나 잘 먹는 친구와 나였지만 이것만은 좀 힘들었다. 


이때의 뼈아픈 경험 때문에 아무래도 메뉴는 좀 신중해졌다. 대강 눈치로 알아들을만한 메뉴는 넘기고 생소한 것들은 하나하나 번역해 보았다. 그렇게 한참 번역을 하다 딸이 웃음을 터뜨린다. 


‘햄과 치즈를 넣은 양말’. 


나도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눈물 콧물과 함께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이 이상한 양말의 정체가 궁금해 당장 주문해 보았다. 기대하던 양말을 받아 든 순간, 왜 이 피자가 ‘양말’로 번역되었는지 알 것 같다. 공갈 빵처럼 커다란 밀가루 반죽 안에 토마토 소스를 베이스로 한 햄과 치즈가 들어가 있다. 바삭한 도우를 깨뜨리자 안에서 김이 실처럼 가느다랗게 피어오르고, 잘라진 껍데기를 녹은 치즈에 찍어 먹으니 너무너무 맛있었다. 이날 우리의 양말은 대성공이었다. 



낮엔 젤라또 메뉴를 번역하다 또 웃음이 터졌다. 젤라또 종류가 워낙 다양해 뭘 먹어야 할지 헛갈렸고, 색깔만 보고 녹차인가 하면 멜론이었고 바닐라 같아 보이는 건 또 코코넛이었다. 결국 낯선 이름을 하나하나 번역해 보다 ‘스트라치아텔라 (stracciatella)’를 발견했다. 바닐라 위에 초콜렛이 얹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스트라’라는 말로 시작하는 거 보니 혹시 안에 딸기 strawberry 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그렇게 딸이 얼른 찾아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누더기?’


말의 어감이 우리와 다를 수 있다고 이해하려 해도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누더기라니 많이 이상하다. 남은 재료는 모두 갈아 넣었다는 뜻일까? 흥부네 가족의 이러 저리 기워 놓은 누더기 옷이 생각났다. 궁금하면 꼭 먹어봐야 한다. 역시나 초콜렛이 뿌려져 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고, 다행히 안에 다른 재료는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로 젤라또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이 ‘누더기’가 보였다. 꽤나 인기있는 맛인가 보다.







한번은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 선생님에게 간단한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이런 저런 말이 한 귀로 들어왔다 한 귀로 나가서 ‘본 조르노’ 라는 ‘안녕’밖에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날 오후 평소보다 좀 많은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들어섰다. 몇 일 이어진 여행에 아이들끼리는 대강 나이를 텄는데, 신기하게도 우리 딸과 같은 나이의 학생들이 4명이나 있었다. 물론 그들끼리 친해지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호텔로 들어서는 순간, 이 젊은 아이들이 프론트 직원에게 ‘벨로’라고 인사하며 웃고 난리다. 딸에게 물어보니 ‘잘 생겼다’는 뜻인데 남자에게 쓰는 거라고 가이드님이 알려 주셨다고 했다. 역시 어린 애들은 응용력이 좋다. 모두들 웃으며 그 직원을 보니 과연 훤칠한 키에 곱슬거리는 머리가 꽤나 잘 생긴 청년이었다. 게다가 ‘벨로’라고 하니 약간 우쭐대며 과장되게 인사까지 해주니 어린 여자애들은 더 좋아서 난리였다. 하지만 그런 호감도 잠시 호텔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는 벨로를 발견하고 나니 환상이 다 깨져 버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왜 그 안 좋은 담배를 처량한 자세로 피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번 여행은 패키지 투어다 보니 여러 도시를 효율적으로 돌아볼 수 있어 좋았지만, 자유시간이 거의 없어 좀 아쉬웠다. 그래도 틈틈이 딸의 여행 미션인 인스타그램 릴스도 몇 개 찍었고, 하루 젤라또 하나 목표도 달성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남편이 여행에 대해 물으니 딸이 대답한다. 


매일 누더기를 먹고, 배고플 땐 양말도 좀 씹어 봤지. 잘생긴 벨로에게 배신당해 기분은 좀 별로였지만 말이야.’ 

작가의 이전글 우한별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