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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Aug 25. 2023

zzz 아기가 자고 있어요!

402호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다. 며칠 인테리어도 바꾸고 이사도 들어오는지 떠들썩했는데 집주인은 누군지 잘 안보였다. 동네 소식은 모르는 게 없으신 터줏대감 401호 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젊은 신혼부부고 엄마가 만삭이라고 했다. 친정 엄마가 바로 옆 동에 사신다고, 배도 부르고 힘드니까 이사하는 동안 아마 친정에 가 있었을 거라고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집에 오니, 떡이 든 종이 가방이 문에 매달려 있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 두고 간다며 반가운 메모와 함께였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옆집 현관문에 귀여운 아기 그림이 붙었다. ‘ZZZ’ 라며 코 자고 있는 민머리 아기 옆에는 ‘아기가 자고 있어요, 초인종은 누르지 말아 주세요.’라는 부탁의 말도 쓰여 있었다. 그새 아기가 태어났구나. 갓 태어난 아기라니, 그 귀엽고 예쁜 얼굴이 상상되며 나까지 설렜다. 그리고 그날 저녁 402호 아기 아빠가 또 떡을 들고 왔다. 떡 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고 엄마와 아기 모두 건강하다며, 어느새 산후 조리원에서 퇴원했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인사하는 아빠가 왜 이리 어려 보이는지, 속으로 ‘애들이 애를 낳았네.’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사실 내 꿈은 빨리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제 스무 살이 된 딸 하나지만, 얘가 얼른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면 싶다. 물론 딸은 질색이다. 요즘 애들은 결혼도 할까 말까지만 아이는 절대 안 낳겠다고 하니 말이다. 자기들도 크면서 부모의 돈과 노력이 보통 드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아기에게 자기 인생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야무진 다짐까지 하고 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다리 퉁퉁 부어가며 금요일 저녁까지 꼬박 일하고, 그다음 주 수요일에 애를 낳은 나다. 90일 출산 휴가 끝나자마자 육아 휴직도 없이 복직도 했다. 베이비시터 어렵게 구했더니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겨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해서, 눈치 보며 조퇴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시어머니 동생인 시이모님이 매일 오시기로 했고, 좋다 싫다 말도 못 하고 속앓이만 몇 년 했다. 


그때 절실히 느꼈다. 손주는 내가 직접 키우겠다고 말이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할머니가 돼서 ‘아기 엄마’라고 오해받는 게 내 꿈이 되었다. 딸에게도 이런 내 마음을 전하며 대학 때 결혼해도 된다고 은근히 떠 보기도 했다. 그런 마음으로 옆집 어린 부부를 보니 왠지 내 꿈이 불가능한 거 같지 않아 신이 난다. 


다음 날 나는 동네 서점에 들렀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떡을 두 번이나 받았으니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달님, 안녕’이 있는지 물었다. 요즘 엄마들은 정보도 빠르니 이미 살 책은 다 샀겠지만, 왠지 우리 애 어릴 때 좋아했던 책이라면 모든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서점 아저씨도 그 책은 아주 옛날 거라며 그걸 콕 짚어 찾는 내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셨다. 하긴 20년 전 읽혔던 책이니, 그 세월 동안 더 좋은 책들과 교구가 많이 나왔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책장을 좀 더 뒤져 보다 익숙한 그림책을 발견했다. 


‘사과가 쿵!’ 빨갛고 큼지막한 사과가 나무에서 ‘쿵’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가고, 다람쥐, 토끼, 돼지 너구리, 심지어 악어, 사자까지, 산속 모든 동물들이 사과를 한 입씩 베어 먹는 이야기이다.  ‘쿵’이란 소리를 낼 때마다 딸이 아주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오래된 책이라도 느끼는 감성은 그대로인지 아직도 꾸준히 팔리는 것 같아 반가웠다.


그날 ‘사과가 쿵’과 함께 아기 촉감책까지 해서 옆집 문 앞에 걸어 두었다. 이미 옆 집 앞은 선물이 수북하다. 나 말고도 아파트 주민분들 모두가 하나둘씩 두고 가셨나 보다. 역시 통 큰 401호 아주머니는 큰 과일 바구니를 놓아두셨고, 작은 내복이나 모자 양말까지 이웃들의 알록달록한 포장 가방이 여러 개다. 역시나 화기애애한 우리 아파트 주민 분들이다. 이 선물들을 풀어 볼 젊은 부부가 얼마나 놀랄지 싶다.




이후로 우리 가족은 복도에서 살금살금 조용히 지나간다. 우리끼리 아기를 부르는 별명은 ‘ZZZ’인데, 그 집 앞에서는 ‘ZZZ가 자고 있어.’라며 서로 주의도 준다. 주말 아침 강아지와 산책을 나갔던 남편은 오늘 ZZZ를 봤다고, 드디어 유모차를 타고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하더라고 반가워했다. 다음에 만나면 나도 그 작은 얼굴을 보며 까꿍하고 반가운 인사를 해 줘야겠다.


ZZZ야. 세상에 나온 걸 정말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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