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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젤리 Aug 10. 2023

우한별곡

남편이 중국 우한에 파견 근무를 다녀왔다. 나는 아이 학교 문제도 있고 해서 남편과 같이 가지 않았지만, 두 달에 한번 정도 오다 가다를 반복하는 두 집 살림을 했다. 


처음에는 ‘우한’이라는 도시 이름이 참 낯설었다.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그냥 중국 한가운데에 있는 내륙 도시라고, 중국의 화로라 불릴 정도로 여름엔 뜨겁고 햇빛이 화살 같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겨울이 따뜻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나라보다 지표상으로는 좀 따뜻하다지만 여러모로 더 춥게 느껴졌다. 아마도 아파트 단열이 좀 부실했던 건지 전기 매트를 틀면 바닥은 따뜻해도 입김이 나왔고, 에어컨 난방을 틀면 얼굴이 찢어질 것처럼 건조해지곤 했다. 


어쨌든 남편은 코로나19가 터지기 몇 달 전 서울로 돌아왔다. 우리는 이후 갑작스레 터진 우한발 코로나 소식이 남의 일이 아닌 듯 걱정되었지만, 기막힌 타이밍으로 복귀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격리로 고통받는 중국인들의 모습이나 한산한 우한의 도로들을 뉴스에서 볼 때면, 내가 다녀왔던 그 활기찬 도시가 맞는지 믿기지 않았다. 




우한에는 진짜 사람이 많았다. 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건물마다 도로마다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더운 여름날 티셔츠를 까고 참외 배꼽을 보이고 걷던 배 나온 아저씨들, 엉덩이 부분만 동그랗게 구멍을 낸 옷을 입고 아무 데나 노상방뇨를 하던 아기들, 전기 오토바이로 소리도 없이 바로 옆을 쓱 지나가던 언니 오빠들, 하나하나 보면 무질서해 보이지만, 나는 그들의 사람 사는 냄새가 보였다. 


하루는 혼자 동네 마트를 갔다. 동네에 규모 있는 마트들이 꽤 있었는데, 시설은 정말 좋아 보여도 사람들의 행동은 흥미로웠다. 과일이나 야채를 사면 무게를 달아야 했는데 이 작은 수고가 때로 엄청난 눈치와 체력 싸움이 되었던 것이다. 아줌마들이 서로 자기 것을 먼저 달아 달라고, 그 작은 저울 앞에서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고 난리였다. ‘우리도 저런 적이 있었지’라는 추억을 되새기며, 누군가 저울 위 복숭아를 치우는 순간 나는 잽싸게 내 사과 더미를 그 위로 던졌다. 앞 쪽에 있던 할머니 아줌마들이 ‘누구야!’라는 듯 성난 눈으로 뒤를 본다. 그때의 그 승리감이라니. 그들은 내 키를 당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지하철 빈자리를 사수하려고 멀리서 가방을 던지던 한국 아줌마들의 후예가 아닌가. 그날의 승부욕과 승전보를 남편에게 전했더니 혹시라도 한국 가서 똑같이 하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 


어느 동네나 중국인들은 광장에 모여 춤인지, 무술인지 모를 단체 무용을 많이 한다. 주로 아침에는 태극권을, 저녁에는 사교춤 같은 것을 말이다. 신기하게도 조금 공간이 있다 싶은 곳은 여지없이 조그마한 스피커가 바닥에 놓이고, 리더로 보이는 사람을 필두로 진지한 의식이 이어졌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광장에도 아침마다 10명의 아주머니들이 태극권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남편 회사 동료의 아내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선생님은 우리보다 일 년 여 먼저 파견되어 오셨는데 놀랍게도 중국어가 능통하셨고, 모든 배움에 얼마나 적극적이신지 정말 본받고 싶은 분이었다. 조심스레 같이 해도 되는지 여쭤봤더니 크게 환영해 주셨다. 외국인이 중국 문화에 관심을 가져주는 걸 중국인들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현지인들의 태극권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원래 태극권은 여러 분파가 있다고 하는데, 건강 체조로써 태극권은 조금 간소화되어 24개의 초식이 있다고 한다. 우리 팀의 리더는 70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로 깡마른 몸이지만 우아하고 꼿꼿하신 분이셨다. 때로는 절도 있게, 때로는 유려하게 동작을 이어 가셨는데, 무용하듯 흐느적대는 나에게 태극권은 춤이 아니라고 충고해 주기도 하셨다. 태극권은 아무리 덥고 아무리 추워도, 눈이 와도 비가 와도 이어졌다. 하루는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지만, 모두들 익숙하다는 듯 광장 건물 처마 밑에서 일렬로 동작을 이어 나가기도 했다. 


나는 처음 온 데다 말도 안 통하는 한국 사람이라 선생님이 가장 잘 보이는 대열의 맨 앞자리를 양보받았다. 중국 사람들이 알고 보면 모두들 그렇게 순진하고 착할 수가 없다. 지극히 몸치인 내가 앞에서 허우적 대는데도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칭찬해 주고, 혼자 연습해 보라고 동영상도 추천해 주셨다. 


그렇게 이어진 태극권의 인연으로 중국어가 능통한 한국인 선생님과 함께 동네 문화센터에 가 보았다. 우한이 워낙 큰 도시라 버스를 내려서도 한참을 땡볕에 걸어가야 했지만, 출발 전 미리 거리에 대한 경고를 듣고 나니 걸을 만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상암동 같은 큰 경기장이었고, 건물 실내는 이미 사람들로 복작댔다. 첫 일주일 동안은 모든 프로그램을 무료로 체험해 볼 수 있었지만, 말귀를 못 알아듣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별수 없이 좀 익숙해 보이는 서예 교실에 들어가 보았다. 4-50명의 중장년층들이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고, 선생님이 시범을 보이며 설명 중이셨다. 친절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붓을 빌려주고 써보라고 종이까지 아낌없이 주셨다. 그들에게 일필 휠지로 대단한 명언을 하나 써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유일한 한자인 내 이름만 열심히 써 드렸다. 




나는 우한에서의 하루하루가 참 즐겁고 알찼지만, 남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리저리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하루 종일 혼자 있을 나를 걱정했지만, 나중엔 나를 위해 우한에 더 있어야 하나 고민했다고도 했다. 사실 꼭 우한이 아니라도 나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곳, 서울에서도 즐거운 일은 널리고 널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남편이 퇴직하고 나면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 장기간 머물러 보고 싶다. 잠깐 하는 여행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더 보고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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