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미젤리 Feb 27. 2024

그림으로 책 읽기

- 독서 모임 4

 너무 이상한 소리 같지만, 나는 그림책에서 글만 읽었다. 그림은 글을 설명해 주는 배경일뿐, 그림책은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매개로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결국 그림책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 모두 글을 배우자’는 것이며,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이런 생각을 자연스레 심어주려는 어느 머리 좋은 사람들의 전략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얼마 안 되는 그림책 속 짧은 글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대게 그림책은 아이들을 주독자층으로 했고, 실제로 맞닥뜨리면 식겁할 곰이나 사자, 호랑이 또는 내가 정말 무서워하는 쥐, 고양이 등이 나오곤 한다. 아이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냈고, 엄마 아빠 할머니들은 모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고 말이다.


 그래서 그림책을 덮고 나면 동심 파괴를 하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솟았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얼른 알려주고 싶었다. 귀여운 곰돌이 같은 것은 없으며, 길에서 곰을 만나면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고 말이다. 미키 마우스 같은 영리한 꾀돌이 쥐는 없으며, 쥐는 쥐약을 써서 박멸해야 하는 해로운 동물이라고 말해 주고도 싶었다.




 그리고 오늘 독서 토론 모임에서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을 읽었다. 빌리는 김에 작가의 또 다른 책 ‘틸리와 벽’도 같이 빌렸다. 물론 1분 만에 휘리릭 읽었다.


 프레드릭과 틸리 모두 쥐들인데, 프레드릭은 다른 아이들이 일할 때 혼자 딩가딩가 노는 배짱이이고, 틸리는 가만히 있는 벽의 건너편이 궁금해 땅을 파 넘어가 보는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탈북자 같은 생쥐이다. 어쨌든 오늘 독서 토론 책은 ‘프레드릭’이니 틸리에 관한 나의 감상은 넘어가겠다.


 프레드릭의 친구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열심히 일하며, 가만히 있는 프레드릭에게 무얼 하고 있는지 계속 묻는다. 그는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고 있다고 하지만, 눈을 반쯤 감은 프레드릭은 확실히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겨울은 오고 만다. 식량도 다 떨어져 갈 즈음, 프레드릭은 친구들에게 햇살과 색깔을 상상하게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도록 한다.


 독서 토론 회원님들 모두 밝고 맑은 마음으로 따뜻한 공감의 시선을 많이 주셨다. 먼저 놀고 있는 프레드릭을 비난하지 않고 기꺼이 음식을 나누던 가족애에 대해 이야기했고, 글의 말미 ‘프레드릭, 너는 시인이야.’라고 이야기하는 친구들에게 ‘나도 알아’라고 수줍게 말하는 프레드릭의 자존감도 칭찬했다. 토론을 이끄시는 선생님은 ‘그림책의 글은 그림에서 모자란 부분을 설명하는 용도일 뿐, 그림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는 깨달음도 주셨다.


 하지만 나는 ‘농부들이 이사를 가자, 헛간은 버려지고 곳간은 텅 비었습니다.’라는 글이 마음에 남았다. 이번 겨울은 농부들이 남긴 것들로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다음의 수많은 겨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걱정해야 하는 건 아닌지 말이다. 프레드릭의 상상은 약간의 노동과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이었을까? 프레드릭의 이야기는 다른 친구들과의 소통을 통해 쌓을 수는 없었을까?


 우리는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 아무리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험악한 인상을 가진 사람은 피하고, 가진 것 하나 없지만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에게 사기도 잘 당한다.


 그러니 프레드릭,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으는데 네 인생의 전부를 쓰지는 말아 줘. 친구들이 힘들어하면 그들을 이해하고 돕는 모습을 보여줘. 내년 겨울에도 생쥐들이 너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도록, 모두들 바쁘게 일할 때는 너도 함께해 줘.


 그게 정말 더 춥고 힘든 겨울이 왔을 때, 지금처럼 착한 친구들만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결국 오늘도 난 그림책을 야박하게 해석하고 꼰대처럼 잔소리만 했으며, 그림은 안 보고 글만 보는 상상력 부족을 드러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