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차 직장인이 다녀온 2주 간의 히말라야 트레킹 이야기
"그래, 히말라야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벌써 작년이 되어버린 2019년, 5년 장기근속 근무로 2주 리프레시 휴가를 받고도 어디를 가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던 중, 처음에는 나이 서른을 넘기고도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국 땅을 밟아보자는 막연한 허세(?)로 캘리포니아 행 티켓을 끊었다.
뭔가 허전했다. 나는 원래 여행을 가기 전에 디테일한 일정을 짜는 편은 아니다. 여행지를 정하면 항공권과 숙박만 예약해 두고, 대충 볼만한 것들만 찾아둔 뒤 조금 상세한 내용은 하루 이틀 전이나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에 정리를 하는 편이다. (그냥 게으른 거다)
근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항공권만 사놓고 그 간단한 것도 더 이상 알아볼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아무리 혼자 여행을 즐기는 나라지만 2주라는 시간을 미국에서 혼자 보낼 자신도 없었고, 무엇보다 여행의 명확한 "목표"가 없었다. 넓고 아름다운 미국 서부의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싶은 건지, 끊임없이 펼쳐진 미 대륙 횡단 도로를 차로 달려보고 싶은 건지, 아마도 지구에서 제일 멋진 도시일 것 같은 뉴욕으로 가서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뉴요커 허세를 부리고 싶은 건지.... 뭐 하나 내 머릿속에 꽂히는 게 없었다.
그러다 아무 예고도 없이 내 머릿속에 꽂힌 곳. 네팔이다.
여긴 목표가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간결하고 명확했다. 히말라야, 그거 딱 하나!
나는 산을 좋아한다. 아니 어쩌면 산 자체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산을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언제부터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도 히말라야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보면서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아직 국내에도 안 가본 산이 훨씬 더 많고 전문 등산 장비 같은 것도 없지만, 한겨울에도 홀로 한라산/태백산 등으로 가서 심심함과 외로움 따윈 모르고 설산을 즐겼을 정도로 산을 많이 좋아하긴 하는 것 같다.
그런 나한테 히말라야는 일종의 끝판왕 같은 존재처럼 여겨졌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가 있는 히말라야만 다녀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글을 쓰는 지금 100%의 확률로 왠지 다음에 또 가게 될 것 같다
등산 장비나 의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꽤 많은 비용을 들여야 했지만 그래도 저렴한 항공권 (무려 2회 경유)을 구매한 덕택에 어느 정도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내가 챙겨간 준비물을 대충 아래와 같다.
- 등산 가방 60L
- 등산 양말 6족
- 날진 물통 1L
- 헤드 랜턴
- 무릎 보호대
- 바람막이/경량 패딩/고어텍스 자켓 각 1벌
- 등산복 긴팔 1벌 / 반팔 2벌
- 등산복 바지 2벌
- 등산 모자 1개
- 선글라스
- 속옷은 셀 수 없이 많이
- DSLR 카메라 (보급기,,)
- 기타 준비물 보조배터리/물티슈/펜 등
- 침낭(1300g), 등산 스틱은 포카라 현지 숙소에서 렌탈
이 모든 걸 60L 배낭에 넣었을 때 무게가 약 12kg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터 겸 가이드를 고용해서 가지만, 난 처음부터 이번 트레킹은 포터/가이드 없이 혼자 다닐 생각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필요 없는 것들은 줄여야 했다. (근데 카메라는 왜 챙긴 거야)
결과적으로는 후반부에 조금 힘에 부치긴 했지만, 포터 없이 갔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트레킹 중간에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고!
총 순수 트레킹만 8박 9일이었고, 비행시간 외에 앞뒤로 카트만두/포카라에서 머무른 하루 이틀씩 붙여서 총 14일 동안의 일정이었다. (진짜 휴가 알차게도 썼다)
여러 코스 중, 제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스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ABC) 코스와 나의 사랑 마차푸차레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마르디히말 코스 2개를 조합해서 갔는데 각 코스만의 매력이 있어서 뭐가 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ABC 는 역설적으로 최종 목적지였던 베이스 캠프 자체가 주는 경치는 엄청나진 않았지만, 대신 새벽에 안나푸르나 남봉과 같이 봤던 수많은 별들, 그리고 하산길에 보았던 마차푸차레의 경치는 정말 잊을 수 없다. 100보마다 똑같은 경치를 두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으니 내가 얼마나 감격을 받았는지는 짐작할만할 것이다.
ABC 코스와는 조금 느낌이 다른 마르디히말 코스는 또 다른 매력을 뿜는 곳이다. 나무로 우거진 산 속을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옆이 탁 트인 능선을 타고 계속 오르게 되는데, 풍경만 생각한다면 이 코스가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일단 시야가 넓게 트여 있어 답답한 느낌이 없고, 역대급의 일출과 일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들이 있다. 마차푸차레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날씨가 좋지 않아 아쉬움이 조금 있었지만, 멀리서 보아도 충분히 좋았다.
아무리 트레킹 코스 난이도가 높지 않다고 해도, 힘든 순간들이 오긴 온다. 근데 힘들다는 말이 육성으로 터져 나오면서도 그 뒤에 항상 이 말이 따라왔다. "근데 너무 좋아.....!!" (변태 아님)
그냥 내가 여기 와서 이렇게 걷고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2주의 꿀 같은 휴가에 온 여행이니까 뭘 하든 안 좋았겠냐만은, 이건 단순한 기쁨을 넘어선 행복함 그 자체였다. 아마 미국에 그대로 갔다면 허한 마음으로 돌아왔을 것 같다.
역시 뭘 하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이 하는 결정이나 행동은 되도록이면 안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 보면 애매한 상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굉장히 많지만, 생각해 보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항상 애매하게 내린 결정은 뒤가 찜찜하고 후회를 불러왔던 것 같다.
결과가 어찌 되든 나의 선택이 확실하다는 확신만 있다면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부디 올해에도 나에게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게 하는 지혜로움이 충분히 함께하길.
난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혼자 있는 것이 편할 때가 많다. 사람이 많은 모임에 가거나 하면 느껴지는 특유의 불편함이 있어서 웬만하면 잘 가려고 하지 않는 편이다. (그냥 성격이 이상하다고 하자)
이번 여행은 2주라는 시간을 같이 맞춰서 갈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았고, 나름 긴 시간의 여행이기 때문에 괜히 누군가를 신경 쓰다가 여행을 망쳐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포터도 고용하지 않았던 것이었고.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혼자 보다는 같이 하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 ABC 코스에서는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한국분들을 만나서 롯지 구하기가 힘들 때 (혼자 트레킹 할 때는 방 구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나에게 기꺼이 방을 쉐어하자고 얘기해 주었고, 나중에는 저녁에 담소도 많이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다시 한번 그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ABC 코스가 끝난 뒤 마르디히말 코스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일단 체력적으로 많이 지쳐있던 터라 걸음 속도가 처음보다 확연히 느려졌다. 게다가 코스 자체에도 사람들이 ABC 보다는 확연히 적어, 뭔가 계속 혼자만 걷는다는 생각이 드니 정신적으로도 살짝 지쳤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미들 캠프에서 같은 방에 우연히 묵게 된 로만과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난 마리사를 만나게 되었다.
벨기에에서 온 로만은 벌써 히말라야가 4번째인 덕후 중에 덕후였고,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데 평소에도 그림을 자주 그리는 아티스트라 남자가 봐도 너무 멋진 사람이었고 스위스에서 온 마리사도 웬만한 남자들은 혀를 두를 정도로 체력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찍은 사진을 따로 보내주기로 했는데 귀찮아서 아직 안 보내주고 있었.....
아마 이번 2주간의 히말라야 트레킹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춥고, 먹을 것도 부족한 이 곳에서 나는 어디서도 느끼지 못한 풍족함을 느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편안함을 되찾았을 때, 오히려 부족함을 더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등만 따숩고 배부른 여행을 했다면, 나의 2주는 어땠을까? 아마 행복하게 보냈겠지만, 새로운 경험을 통한 배움은 없었을 것이다.
참 인간이 간사하다. 내가 처해있는 환경에 따라 조그만 것에도 감사함을 느끼기도 하고, 큰 것임에도 부족함을 느끼기도 하니까. 나는 믿는다. 사람이 발전을 하려면 부족함을 느껴야하고, 거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고.
난 앞으로도 이런 여행을 많이 하려고 한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내가 정말 하고 싶고, 나에게 더 많은 경험을 선사해줄 수 있는 그런 여행. (오글거림주의)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