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재미야, 바보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던 해인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무려 3관왕을 차지하고 당시 많은 세계 기록을 보유했었던 수영 선수가 있다. 재닛 에번스. 71년생 미국인으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며 당대 최고의 수영 선수로 추앙받았었다고 한다.
당시 이 선수가 남긴 말을 어느 책에서 본 뒤로는 한동안 그 말에 꽂혀 살았던 것 같은데, 그 명언은 아직도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점이 되고 있다.
나는 올림픽에 처음 참가해서 출발대 위에 섰을 때 재미있었기 때문에 미소를 지었다. 재미를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 중요하다.
사실 듣고서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무언가 굉장히 인사이트가 흘러넘치는 말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올림픽에 출전해서 세계 신기록을 깨기 전에 저 선수가 느꼈을 감정이 어땠을지 대충 공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필요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지금 내가 마주한 순간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어서 누구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저 선수가 당시 1989년에 세웠던 800m 세계 신기록은 최첨단 소재의 전신 수영복이 허용되었던 (지금은 다시 금지됨)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나 되어서야 깨졌다고 한다. 즐기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는 말이 결코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왔나? 지금 내 인생은 재미가 충분히 있는 삶인가? 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낼 수밖에 없는 직장인으로서 제일 먼저 돌아보게 되는 것은 역시나 나의 "일"과 "직장"이다.
나는 지금 나의 일과 직장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직장에서 재미를 느끼며 다니는 사람은 정말 찾기 쉽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 나는 생각보다 운이 좋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재미를 느꼈던 자동차와 관련이 깊은 일을 하고 있어서 참 행운이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초등학교 등하굣길에 서있는 자동차 이름을 하나하나 말하면서 다니던 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 때 강남에 있는 수입차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카탈로그를 받으러 다니고, 대학생 때 자동차 하면 떠오르는 나라인 독일로 교환학생을 가서 혼자 모터쇼도 가보고 했던 걸 보면 꽤 꾸준하게 재미를 느꼈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고 이런 점이 지금 나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느끼는 모든 재미나 효용은 처음과 같을 수가 없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두 번째, 세 번째 맥주잔을 첫 번째 맥주잔보다 더 맛있게 마시진 못할 것이다.
내 길지 않은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내가 좋아하고 재미있는 일을 하니 그렇게 재밌어서 야근도 야근이라고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젠 그런 재미는 많이 사라져 버렸다. 부서 이동도 하면서 회사에서 더 큰 흥미와 재미를 찾아보려 했지만, 딱히 길게 지속되지는 않았다. 자동차에 느끼는 재미와 흥미는 여전하지만, 회사에서 느끼는 재미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아무래도 취미로 즐기는 것과 일로 즐기는 것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
어쨌든, 그래서 더 절망적이었던 것 같다. 내가 정말 재미를 느끼고 했던 일인데, 이것보다 재미있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아서 난 더 이상 무슨 일을 해야 즐거운 것인지도 모르겠고 어떤 일을 더 잘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는 기분은 정말이지 유쾌하지 않았다.
매너리즘에 빠져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나는 게 싫어 계속 재밌는 게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5주년 기념으로 2주 동안의 장기 휴가를 다녀오고 난 뒤에도 나아질 줄 알았던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런 내 자신이 싫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고민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욕심을 내려놓으니 잃어버렸던 재미가 조금씩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예전처럼 불 타오르는 재미는 아니지만, 계속 억지로 재미를 찾으려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니 오히려 자연스러운 재미들과 그 주변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뻔한 얘기이긴 하지만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 마음가짐에 달려 있었던 것인데, 항상 인간이란 동물은 그 사실을 망각하고 산다. 내가 취하는 외부 요인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변하는 것이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재닛 에번스는 은퇴 후 무려 41세의 나이에 2012년 런던 올림픽 출전을 위해 수영장으로 복귀했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매일 새벽 4시에 수영 연습을 하고 돌아와서, 애를 돌보고 오후에 다시 연습을 하는 강행군을 펼쳤지만 결국 출전권을 획득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재닛 에번스는 본인이 정말 다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다시 복귀한 것일까? 경기가 끝난 뒤 그녀가 했던 인터뷰를 보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시 돌아와 수영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더 빨리 헤엄치길 바랐다. 하지만 다시 수영을 할 수 있었고, 내 몸이 받쳐줬고, 많은 사람이 응원해줬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소파에 앉아 '어떻게 될까?' 하고 궁금해하는 대신 내가 직접 해냈다는 것에 만족한다.”
그렇게 바로 은퇴서에 마지막으로 쿨하게 사인한 재닛 에번스의 마지막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지 않을 수 있지만, 본인의 분야에서 재미를 느끼며 최선을 다했던 그녀가 너무 부러울 뿐이다.
재미를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 재미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물어보자. 내가 재미를 느껴서 시작한 일인가? 내가 앞으로도 잘할 수 있는 일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