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츠심 Aug 06. 2021

습관적으로 메모하면 좋을 줄 알았지

명확한 메모만이 유효한 기록이다

21년 8월 4일 수요일

조금만 움직여도 기운이 빠지고 땀이 나는 날씨가 오늘 유독 진절머리 났다. 신경질이 잦아진다.


 시간이 많아서 일까? 하노이에 온 후로 지나간 순간들에 대해 자주 떠올리곤 했다.

그 순간들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땐 휴대폰에 남아있는 무수한 기록들을 찾아봤다. 남아있는 기록으로 다시 생생하게 그 순간에 머무르기도 했고, 때로는 남겨지지 못한 기록이 아쉬워 더욱이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개 사진과 영상을 위주로 봤는데 오늘은 문득 글이 떠올라 사진첩 대신 메모장을 열었다. 그 속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중요한 내용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이 꽤나 많은 흔적들로 쌓여있었다.



 많은 메모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이미 필요가 없어진 기록, 잠시 잊고 있던 기록, 뭘 정리했는지 알 수 없는 기록들이 가득했다. 이미 오랜 시간 방치해둬서 더 이상 그대로 놔둘 수 없었고 메모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일단 무수한 메모들을 대략적으로 읽어본 후 폴더에 분류했다. 제자리에 맞게 들어갔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메모들은 몇 글자 덧붙여 기억의 조각을 모으는 일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필요 없는 내용은 가차 없이 삭제했다. 그때의 상황과 감정이 당최 떠오르지 않는 기록들은 남길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지웠다. 궁금증만 남긴 채 사라졌다.


 예외도 있었다. 3년 전 어느 날 누군가와 했던 대화의 일부를 기록해놓았는데 왜 남겨놓은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말들만 남아있다. 몇 번을 봐도 모르겠다. 이 대화를 나는 왜 기억하고 싶었을까? 휴지통을 꾸욱 누르려는 손가락을 멈췄다. 그대로 남겨두고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쓰이는 대화라서 쉽사리 지울 수가 없었다. 괜히 신경이 쓰인다.

무심코 툭 던진 말 한마디에 생각이 많았던 밤이었다.

J: 영화 볼 시간이 없어요.
W: 퇴근하고 보면 되죠, 볼 시간 돼요.
J: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런가 봐요.

어느 날 나는 J였고, 어느 날은 W였다.

- 2018. 11.15 22:11





 어릴 때부터 메모에 대한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성공한 사람들은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고, 사람의 기억력은 그리 긴 편이 아니라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가지면 좋은 습관이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메모하는 습관이 삶의 여러 부분에서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입사원이 들어올 때면 딱히 다른 말은 해줄 게 없고 메모하는 습관이 업무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말은 항상 했던 것 같다. 나 또한 사수에게 들었던 말이자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여전히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 습관적으로 메모하고 있다.


 오늘 마주하게 된 휴대폰 속 습관적 메모의 결과는 조금 처참했다.

기록은 점점 늘어가는데 제때 정리를 해두지 않아 메모의 의미를 잃었다. 목적이 보이지 않아 그 기록은 쓸모 없어졌고 그 수고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메모를 할 당시에 조금만 더 신경 써서 하면 되는데 시간에 쫓기거나 귀찮아서 쓱쓱 빠르게 해 버리느라 알 수 없는 메모가 완성되었다.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꼼꼼히 했다면 혹은 나중에 한 번만 더 정리했다면 좋았겠지만, 나의 기록에 그런 여유가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 습관적으로 메모하는 습관만 들였지, 메모를 잘하는 습관은 들이지 못했다.



 9개의 메모는 끈질기게 기억을 더듬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쓸모가 없어져 삭제되었다.

쓰임새가 없어졌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유효한 것이 무효해졌고 가지고 있던 게 없어진 것으로, 애초에 쓰임새가 없었던 것보다 더 슬픈 일이다. 습관적으로 메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메모의 목적이 명확하게 잘 보이도록 기록해야만 비로소 그 메모가 의미 있어지는 게 아닐까.


 나의 잘못된 메모 습관으로 찰나의 순간이 영원히 잊히게 되었다. 속상하다. 최대한 많은 것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잊고 싶지 않은 것이 많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기록만큼은 영원하다.

메모를 잘 하자, 어려운 일 아니잖아?

술 마시면서도 습관적 메모
매거진의 이전글 달걀 껍질 까면서 뭐 이런 생각을 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