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캉스와 자가격리의 중간 어딘가

14일 동안의 소소한 행복들

by 이츠심


호캉스 아니고 자가격리

하노이에서 처음 맞는 아침은 고된 기다림과 늦은 새벽 체크인으로 인해 많이 피곤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자고 싶었지만, 아침 8시에 식사가 도착했다고 알리는 노크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이후에도 매일매일 식사시간마다 울리는 노크 소리에 의해 늦잠 자는 것은 어려웠다. 물론 그렇다고 늦잠을 자지 않은 것은 아니다. 중간에 한 번 깼다가 다시 잠을 청했다.


격리 기간에 할 일이 없어서 12시까지 늦잠을 푹 자고 낮잠도 푹 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사뭇 다른 일상이었다. 노크와 더불어 전화가 자주 왔다. 물론 내가 전화할 일도 생각보다 많다.

그래, 이것은 호캉스가 아니라 자가격리이다.




물의 양면성, 그럼에도 물.

내가 머물게 된 호텔에는 2가지의 뷰가 있는데, 호수가 앞에 펼쳐진 호수뷰와 작은 도로가 보이는 도로뷰 이다. 나는 아주 운이 좋게도 호수뷰에 배정받았고, 그 덕분에 자가격리를 하는 내내 답답함이 덜했다. 또한 매일매일 호수 주변을 관찰하는 재미 또한 있었다. 낮에는 낚시 하는 아저씨들을 구경하고, 저녁엔 조깅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호수에 분수가 나올 때는 가만히 분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지나갔다. 시간은 참 잘도 흘러갔다.


다만 호수 앞이라 습함이 몇 배로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더욱 습했다. 난생처음 습도계에서 80이라는 숫자를 보았다. 그와 동시에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베트남의 습한 날씨임을 실감했다.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놓아도 이 강력한 습도를 이길 수는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수뷰와 도로뷰 중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호수뷰이다. 습하다는 이유로 인해 포기하기엔 물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묘한 낭만이 눈 앞에 자꾸 아른거린다.




룸서비스라 말하고 맥주라 읽는다.

나는 맥주를 좋아한다. 그리고 즐겨마신다. 베트남에 머물기로 결정을 내린 후 가장 먼저 찾아본 것은 맥주 가격이었다. 맥주 한 캔에 소비되는 비용이 얼마인지는 헤비 드링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리고 아주 기쁘게도 베트남 맥주 물가는 저렴한 편이었다. 330ml 기준으로 5-600원 정도였다. 에헤라디야, 맥주 파티로구나!


다만 맥주 파티를 하기 전에 나는 14일의 격리 생활을 이겨내야 했다. 그 기간 동안 맥주 없이 살 생각을 하니 아득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검색해보니 룸서비스로 맥주를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희망을 가진 채 베트남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호텔에서는 삿포로, 하이네캔, 타이거 3가지의 맥주를 판매하고 있었고, 격기 기간 동안 모두 마셔봤다. 메뉴에 소주도 있었지만, 소주는 안주가 너무나도 중요한 술이기에 격리 후 밖에서 먹기로 했다. 3가지의 맥주 중 내 입맛에 가장 잘 맞는 맥주는 삿포로였다. 내내 삿포로만 주구장창 마셨다. 살얼음이 얼 정도로 시원한 삿포로의 맛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이 환상적인 맛은 격리 기간 중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룸서비스로 주문하는 맥주의 가격은 한화로 2천 원 정도로, 비싼 편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주 쿨하게 많이 먹었다. 룸서비스 항목에 와인은 없어서 마시지 못했다. 매일 맥주를 마시다 보니 와인 생각이 간절해지는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격리가 끝나면 낮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끈한 음식을 먹고 저녁에 레드 와인 한 병을 거하게 마셔야겠다는 계획을 떠올리며 와인 생각을 지워냈다. 나중에 호텔을 나오면서 룸서비스 비용을 계산할 때 맥주 가격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역시 나다운 결과였다. 어쨌든 마시는 동안 행복했으면 그걸로 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무엇을 하며 지내었는지 모르게 14일이 훌쩍 지나갔다. 지루함에 몸서리치며 가지 않는 시간을 원망할 것이라 생각했던 예상과는 다른 나날들이었다. 몸서리칠 시간도, 원망할 시간도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식사가 준비되고, 식사 후 커피 한 잔 혹은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친구들과 연락하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된다. 편한 자세로 누워 잠이 오기 전까지 드라마 몇 편을 보다 보면 하루는 끝이 난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의미 없는 나날들을 보내는 것이 나는 정말 좋았다.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나 큰 평온을 가져다줄지 몰랐다. 회사를 다니며 늘 해야 하는 일이 가득했다. 회사를 그만두면 좀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회사를 그만둔 후에는 베트남 입국을 준비하기 위해 또 할 일이 가득했다. 계속해서 바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비로소 맞이하게 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날들은 나에게 진정한 쉼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끔 했다. 그동안 쉬었다고 생각한 순간들은 쉬었다기보다 숨 고르기 했던 시간인 것 같다. 앞으로 나의 인생에 쉼이 찾아온다면 아주 격정적으로 잘 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의미할 것 같았던 14일의 시간 속에 좋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에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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