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된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진다. 한강 <소년이 온다>
5월은 상춘곡의 나날이지만 44년 전 광주의 기억을 머금은 계절이기도 하다. 그날의 산증인인 100세 윤공희 대주교를 지난달 2일 전남 나주에서 만났다. 그는 24년 전 은퇴한 뒤론 녹음에 둘러싸인 주교관에서 지낸다. 일흔인 엔다 수녀가 한라2세·해피·노마 세 마리 반려견과 함께 대주교 곁을 지킨다.
성찰과 회한이 가득 담긴 1시간 남짓한 인터뷰가 끝난 뒤 대주교에게 슬며시 물었다. “슬픔이 오면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그러자 성직자다운 답변이 되돌아왔다. “슬픔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면 괴로워집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마 어려운 일일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살아내야 하는 삶의 의미를 잘 받아들여야 하고, 감정을 이성으로 다스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믿음이 있어도 마음이 어려우면 어떻게 할까요?”라고 반문했더니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살짝 얹더니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후 알게 됐지만, 윤 대주교는 이날 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내색은 안 하셨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으셨을 터.그럼에도 100세 노주교는 30대 풋내기에게 같이 사진 찍자며 웃어보였다. 부디 이 인터뷰가 윤 대주교의 생전 마지막이 되지 않길. 엔다수녀의 소망처럼 언젠가 떠나시더라도 평안함이 함께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