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아지느니 불편해지려고 한다

사람에 대한 예의 | 권석천

by 심지

‘편견, 혐오, 차별, 배제’. 이런 단어가 모두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책을 통해 기자는 고백한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믿는데서 비극은 시작한다고. 자신이 '상식적이다'라는 믿음에서 벗어나 ‘낯선 나’와 마주할 것을 강조한다.


‘자주 의심할 것.’ 낯선 나와 마주하는 건 내가 있는 ‘지금 여기’를 자주 의심해보고 들여다보는 일이다. ‘너를 위한다’는 속삭임도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너를 위하는’ 게 아니라 결국 ‘나를 위하는 건’ 아니었는지 말이다. '너를 위한다'는 미명하래 강요하고 요청하는 건 폭력에 가깝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적 거리는 반드시 필요하다. '식구끼리' '한 솥밥 먹고사는 사이에' 특히 필요한 건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닐까.


‘침묵하지 말 것’. 때로 침묵은 금이 아니라 흉기가 된다. n번방 사건을 대학생 두 명이 취재해서 세상에 알리기까지 기자들도 방조 혐의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한다.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최근 입양아 학대 사망사건에서 가해자는 부모만이 아니다. 아동학대 의심은 세 번이나 이어졌지만 아이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침묵했던 경찰도 보호기관도 혐의를 벗기 힘들다. 방관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나부터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하찮해지느니 불편해지기로 했어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이의 말을 빌려 기자는 말한다. 나쁜 일을 마주했을 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그러려면 자기 기준과 원칙이 명확해야 한다고 말이다. 소설 편지글 인터뷰를 넘나들며 질문을 계속 던진다. 무엇을 의심해야 하고 무엇에 관대해야 하는지, 편견이라는 미세먼지는 왜 위험한지, 현실에 빠져 자칫 놓쳐버린 태도와 가치가 있었는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자주 멈칫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는 거침없이 행동하지는 못하는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계속해서 글을 쓴다. 영화와 개인의 에피소드를 짧은 지면 안에 인간에서 사회로 확장해나가는 기자의 필력이 날카롭고 시선이 예리하다. 기자는 계속 그가 글을 쓰는 이유를 말한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순간, 진실을 고민하는 순간, 반딧불처럼 작은 진실들이 깜박거리며 빛을 밝히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비극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라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어떤 관계 속에 들어가면 그 관계에 따라 쉽게 변형되기 마련이다. '모르고 짓는 죄'가 '알고 짓는 죄'보다 나쁘다. 알고 짓는 죄는 반성할 수나 있다. 모르고 짓는 죄는 반성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나도 별수 없다'는 깨달음. 인간을 추락시키는 절망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도 그 부근에 있다. p.17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제인의 말은 모순된 듯하다. '인생은 시시하다.'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다.' 이 두 마디를 하나로 합치면 이러할 것이다. 시시한 인생, 인간마저 시시해지면 끝장이다. 혹은, 인생이 시시할수록 인간은 시시해지지 말아야 한다. 제인이 말하는 '인간이 시시해지지 않는 법'은 케이크를 나눠먹는 것이다. 한사람이라도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불행한 사람들끼리 서로의 손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p.53


지상에 단 한사람이라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믿음을 그에게 심어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 역시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한 개인의 이야기인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p.54


기억의 숫자가 많을수록 건강한 사회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양한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그 사회가 건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같을 수도 없고, 같아서도 안 되니까요. (중략)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기억을 갖기 위해 세상과 마주 서야 하지 않을까요. 상황이 불안하고 두렵더라고. 정확하게는 상황이 불안정하고 두려울수록 말입니다. 잊지 마세요. 당신이 직접 경험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고통받은 만큼만 진실입니다. p. 63


중요한 것은 분명한 자기 기준이다. 자기 기준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아무리 힘 있는 사람이 뭐라고 압박해도, 나 자신의 욕망이 뭐라고 유혹해도, 때로는 흔들리면서도, 가야 할 길을 간다. 중간에 경로를 이탈하더라도 내비게이션이 다시 경로를 재설정하듯이, 자기 기준만 잃지 않으면 끝내 목적지에 도착한다. p.201


악착같이 무언가를 쓰고 또 쓰는 건 그래서다. 고소장을 쓰고, 공소장을 쓰고, 판결문을 쓰고, 일기를 쓰고, 기사를 쓰고, 보고서를 쓰고, 논문을 쓰고, 회고록을 쓰고, 소설을 쓰고, 시를 쓴다.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한계들 속에서 주장으로, 반박으로, 재반박으로 공통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진실인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그 순간, 무엇이 진실인지 고민하는 그 순간, 반딧불이처럼 작은 진실들이 깜빡거리며 캄캄한 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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