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성, 역동성, 그리고 웰니스 - 빠르게 실패하고 또 다시 재기할 것
지난번 출장 이후 또다시 한달 간 포트폴리오사들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에서 지내게 되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쨍쨍한 햇살.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리자마자 맞이하는 풍광이다. 윈도우 배경화면을 옮겨 놓은 듯한 이 푸른 하늘을 볼 때면, 내가 드디어 캘리포니아에 도착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는 흔히 실리콘밸리라고 지칭하는 이곳은 알고 보면 꽤나 넓은 지역이다. 우리 회사 본사 오피스가 자리잡고 있는 팔로알토를 기준으로 아래로는 마운틴뷰, 쿠퍼티노와 서니베일, 위쪽으로는 산마테오와 샌프란시스코까지를 아우르는, 전체적인 북부 캘리포니아 지역, 즉 베이(Bay Area)를 넓게 실리콘밸리라고 부르게 된다. 각 지역마다 굴지의 빅테크 본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마운틴뷰에는 구글이, 쿠퍼티노에는 애플이, 멘로파크에는 메타가, 산타 클라라에는 엔비디아가 있다. 그리고 내가 베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인 로즈우드 호텔이 있는 멘로파크의 샌드힐 로드에는 Sequioa, Greylock, NEA, A16z, GGV 캐피탈, Lightspeed 같은 세계 최고의 벤처캐피털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매번 이곳에 올 때마다, 수많은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이 자리 잡은 이 곳. HP, 구글, 애플, 테슬라와 같이 세상을 이끄는 빅테크 기업들이 태동한 이 곳. 무엇이 이들을 다르게 만드는 걸까, 라는 생각을 곧잘 하곤 한다. 스탠포드 대학교와 버클리 대학교 같은 훌륭한 교육기관이 있기 때문일 수도, 사계절 내내 좋은 날씨에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환락거리가 없는 심심한 환경 때문일 수도, 전세계에서 물밀듯 들어오는 훌륭한 인재들이 몰리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실리콘밸리 특유의 마인드셋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잠시 지내면서 체감한 실리콘밸리의 마인드셋은 어찌 보면 일반화할 수 없는 제3자의 단편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짧게나마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을 공유해본다.)
첫째는, 편견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포용성의 마인드셋이다.
학부 시절 칼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짧게 요약하자면, 열린 사회의 유일한 적은 바로 닫힌 사회로 이끄는 닫힌 이데올로지라는 내용이었는데, 베이야말로 그 믿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다. 누구보다 열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곳에도 학연이나 지연과 같은 네트워크 문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이곳의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에게 열려 있다. 똑똑한 머리와 부지런한 태도 그리고 따뜻한 마음만 갖고 있다면 출신이나 배경과 무관하게 기회가 주어진다.
인도에서 약 15년 전에 실리콘밸리로 이사를 온 창업자 출신의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해줬다. '전세계 각국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오고, 미국의 다른 주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오고,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베이로 와. 여기서는 남들한테 판단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Misfits from other parts of the globe move to the Staes, mistfits from other parts of the States move to California, and misfits from other parts of Califronia eventrually find their way to the Bay Area. Here, I do not feel judged.)'라고. 이렇게 베이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의 사연을 듣다보면, 베이 지역을 관통하는 하나의 가치는 포용성(inclusivity)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일요일, 우연히 샌프란시스코의 거리 축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어디까지 이상해질 수 있니(How Weird Festival)'라는 페스티벌이었는데, 빅테크 회사의 시니어 엔지니어, 세 번이나 회사를 매각한 연쇄창업자, 스탠포드 공대 교수 등 그 출신도 다양했지만, 모두가 자신의 수식어를 벗어던지고 누구는 나체로 누구는 코스튬을 입고 누구는 업무를 마치고 와서 음악에 몸을 맡기며 함께 거리에서 대낮부터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라는 관계로 이어진 느슨한 유대감이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축제였다. 국적과 피부색과 외모와 언어와 가치관이 나를 규정하지 않기에 오롯이 본질(quintessence)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여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구글과 애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이 불과 5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세계가 하나되고, AI가 대신 업무를 처리해주고, 모두가 허상이라고 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는 변화의 과정을 목도한 곳이다 보니, 누군가 허무맹랑 해보이는 비전을 이야기해도 귀를 기울이는 듯한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존중받다보니, 동질한 집단에서는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묵살해버리기 쉬운 의견들이 여기저기에서 등장하고, 'Thinking outside of box'를 하는 의견들이 때로는 혁신의 마중물이 되기도 한다.
두번째, 혁신과 변화를 당장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미래지향적 마인드셋이다.
지난 여름, 여느 베이 지역의 식당 여느 테이블에서도 모두 LLM 모델과 AI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재작년에는 모두 NFT가 불러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그 전전 해에는 블록체인 기술에 불러올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술 기반의 변화와 혁신을 통한 성장에 대한 욕구가 유난히 지배적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파이를 서로 차지하려는 제로섬 게임보다는, 기술의 진보를 통하여 파이 자체를 키우자는 생각이 크기 때문에 치열하지만 서로에 대한 경쟁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조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개발자든 마케터든 직종을 막론하고 사이드 허슬(Side hustle)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가설을 테스트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하는 빌더(builder)의 DNA가 있다고나 할까. 추상적인 관념의 영역에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전진(moving forward)하는 허슬링(hustling)의 문화가 있다. 끝없이 작은 비즈니스를 빌딩하고 매각하기를 반복하는 연쇄창업자 한 분에게 물어봤더니, '0 to 1을 하기 위한 근육'도 사용하지 않으면 후퇴되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스타트업 프레임워크를 유지하기 위한 꾸준한 운동을 하는 것이라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자 하는 문화가 팽배하다 보니, 새로운 프로덕트나 서비스를 만드는 것을 거창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일상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긴다. 내 소꿉친구도 내 이웃도 옆에서 코딩을 하고 있는 것을 목도하다 보면, 혁신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기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빠르게 실패하고 또 다시 재기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느껴지는 문화가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서 발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번째, 라이프스타일에 배어있는 웰니스의 마인드셋이다.
전반적으로 건강하게 먹고 건강하게 움직이고 건강하게 공존하고자 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다 보니 도시의 환락을 즐기는 나조차도 캘리포니아에 오면 하루하루를 요가, 명상, 착즙주스, 견과류로 가득 채우게 된다. 신체의 건강과 정신의 건강은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몸을 더 분주히 움직이고 건강한 생각들로 나를 채우게 된다.
그 이상으로 건강한 삶의 핵심은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건강함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내가 소속된 커뮤니티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 또한 클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 잇 포워드(Pay it forward)'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부터 많은 창업가 선배들이 선뜻 노하우와 경험과 네트워크를 내어주기 때문에,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내가 받은 것들을 후배들에게 나눠야 한다는 믿음을 품게 된다. 하나둘씩의 다짐들이 모인지 어느덧 십수년, 선순환의 생태계가 형성되다 보니 '내 의견을 내고, 내 사업을 하는 것'을 덜 두려워하게 되는 것 같다.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할 때 주변의 응원을 받고, 설령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심리적인 환경이 어느 정도는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제3자의 시선에서 본 실리콘밸리의 마인드셋은 어찌 보면 일반화할 수 없는 단편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 어떤 것도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 일을 하고 네트워킹을 하면서 다른 어느 나라나 다른 어느 주들보다 다양성과 변화에 열려 있고 시행착오를 하는 것에 대해 관대한 문화라는 생각이 참 많이 들었다. 그래서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여기에서 도전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번외)
이틀 후면 다시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이고, 또 다시 캘리포니아 라이프 시작이다. 지난 몇달 간 아시아, 중동, 미주를 넘나들면서 함께 나누고 싶은 인사이트도 에피소드도 많았는데, 매번 이래저래 일에 치이다 보면 글로 내 생각을 정리할 만한 시간이 잘 나지가 않는다. 리야드에서 샌프란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장장 2달 간의 출장 동안 얻은 성장의 순간들을 기록해보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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