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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 Jul 05. 2022

과거의 하루 기록 (1)

2021년 06월 27일의 기록

"그림"


'그림'은 나한테 조금은 미묘할지도 모른다. 미술이 좋아서 이과 공부도 접고서 미술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술 전공자인 지금의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하고 싶어 하던 것을 이뤘더니, 싫어지는 것은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래도 그림을 그리면서 얻은 것도 많기는 하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소묘 실력을 (물론 썩 잘 그리는 편은 아니다.) 얻게 되었다고 하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을 제일 후회되지 않게 해주는 요인은 아마도 이로 인해 얻게 된 소중한 인연들인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들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모의고사 성적으로 대학을 간다고 했을 때, 내 성적은 건국대 언저리였다. 수시를 지원했을 때 "잘해야" '중경외시' 급 이상을 쓸 수 있는 그 당시의 나에게는 꽤 초라한 성적표였다. 내 눈높이가 높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공부를 잘 못할 것이라면 차라리 그나마 좋아하는 일이라도 해보자는 정신 나간 발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놓고 생각해보면 엄청난 노선변경이다. 부모님, 선생님들까지 나를 말리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고2의 나는 의외로 대담했던 구석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처음 미술을 시작할 때 만났던 김세훈 원장님은 말 그대로 은사님이라고 할 수 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잘 이끌어주신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초석이 놓였다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조금씩 내가 살면서 사람과 관련되어서 복을 가장 많이 누리게 된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


물론, 준비가 덜 된 탓에 고3 입시 때 처참하게 망하고 재수를 하게 됐다. 하지만 재수학원에 다니게 되면서 만나게 됐던 친구들, 미술학원을 옮기게 되면서 새로 만난 친구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아끼는 친구가 된 고 씨와 임 양까지. 물론 그 외에도 남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셨던 많은 선생님들과, 합격 소식을 전해드리자마자 가장 먼저 축하해주시며 선생님 밑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용돈벌이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유해주셔서 또 많은 인연들을 만들어준 영어학원 선생님도 계신다.


이런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지내면서,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참 기묘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만으로 21년 정도 산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도박수였을지도 모르는데 얻은 것이 생각보다 참 많다. 얻은 만큼 잃게 된다고, 또 나중에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그전에 잃고 지냈던 것들을 생각해본다면 지금은 오히려 보상받는 구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고등학교 시절의 내가 했던 무모한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꽤나 괜찮은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2022년 6월 1일의 첨언


사실 고등학교 시절에 미술을 한 것은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의 내가 되돌아보았을 때는 그렇다. 주위에 머리 좋은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아니면 공부가 하기 싫었던 철없는 고등학생의 큰 반항이었을까. 어느 쪽인지는 그때로부터 시간이 꽤 흘러서 정확히 뭐라고 짚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 자신은 분명 큰 생각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9년도에는 재수를 하고 2020년부터 대학에 들어가 미술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다니다가 (물론 코로나19 때문에 제대로 다닌 날들도 많이 없었다.) 느꼈지만, 생각보다는 내가 미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나중에 후회한다는 말을 곧바로 깨닫게 됐다. 그로 인해서 지금은 또 다른 고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의 고민들은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되겠느냐는 지극히 20대 다운 고민이다. 전공을 옮길까 생각도 해봤고, 미술 전공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도 해보면서 몇 년 전과는 다른 쪽으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점은 후회는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내가 만든 결정들과 그로 인해 겪은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나 스스로에게 나중에라도 양분이 된다고 믿는다. 내가 다른 결정을 내려서 지금과는 다른 일들을 했더라면 흔히 말하는 '평행 우주'의 나처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간의 선택이 미래를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분명한 사실이다. 어느 시점부터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는 걷잡을 수도 없이 원래 방향과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고민을 충분히 하고 내린 선택이라면 최소한 '틀린' 선택은 없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힘든' 길을 걷게 되는 선택과 '조금 더 편했을 수도 있는' 길을 걷게 되는 선택으로만 갈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생물은 목적을 가지고 살며 그 목적은 선으로 귀결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뭐가 됐든, 내가 내렸던 결정들은 분명히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내 선택으로 인해 변하게 될 미래가 두려워서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면 후회할지도 모른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차라리 해보고 후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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