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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 Jul 05. 2022

과거의 하루 기록 (4)

2021년 6월 30일의 기록

"돌고래"


물속에서 사는 포유류 동물은 많지 않다. 수륙양용에, 하이브리드 같은 느낌이 나는 생물체들은 의외로 귀하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람도 활동 가능 범위가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뭍에서 사는 동물이다. 그러나 고래와 같이 물속에서 사는 포유류들은 다르다. 어떻게 갈라져서 어떻게 진화한 것인지는 생물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동물에 깊은 조예가 없어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최소한 그들의 조상은 물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그로 인해서 그들만의 멋있는 '스타일'도 얻게 된 것 같다.


2005년 즈음이었을까? 그 전의 일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때 처음으로 돌고래와 범고래를 보게 되었다. 내 기억에는 플로리다 주의 올란도 씨 월드(Sea World)에서의 일이다.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어렸을 때 그 생물들의 우아함과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 형과 같이 동물 인형을 사서 간직하게 된 것도 15년 더 된 일이다. 어렸을 때는 누구에게도 말했던 적은 없었지만 한때 '돌고래를 기르고 싶다'는 철없는 소망이 있기도 했다. 아쿠아리움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것도 여전히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돌고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난 것이 하나 있다. 되돌아보면, 어렸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꿈꾸고, 그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 늘 당연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게 되었다. 나 스스로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장래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갈피를 도무지 잡을 수 없다. 그나마 남았던 꿈이 결혼을 해서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자는 소망이었지만 조금씩 현실을 알아가게 되는 나이인 지금 그조차도 잘 알 수 없게 된 것 같다. 어른이 되고, 현실을 알게 되고, 흔히들 하는 말로 자기 분수에 맞는 자리에 위치해서 분에 맞게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게 성숙하고 자라는 것이라면, 아예 그렇지 않은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게 되었다. 요즘 들어서 자주 그런 것 같다.


오늘도 그런 날인가 보다.




그리고 지금, 2022년 06월 27일의 첨언


어린 시절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무엇일까. 의외로 주관적인 부분이나 내 마음가짐과 같이 나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점들은 생각보다 차이가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들보다는 확실한 수치로 나타나는 지표들에서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키, 몸무게, 나이 같은 그런 것들 말이다.


한국의 민법 제4조에서는 만 19세가 된 사람을 성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어렸을 때와 현재의 나이 차이 때문에 같은 일을 하게 되더라도 지게 되는 책임의 수준에는 엄연한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행해야 하는 의무도 많아진다. 어떻게 보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현실적인 면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런 현실의 무게로 인해 어린 시절의 모습들을 어쩔 수 없이 두고 가거나 버림으로써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타협보다는 순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나하나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이야기해주시는 일화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면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이유 없이 휴지를 뜯어 물을 묻히고 거울에 던진다거나, 우유와 물을 섞으면 사이다의 색과 비슷해지니 맛도 그럴 것이라고 우긴다거나, 집 앞 화단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며 무작정 모종삽으로 흙을 파냈다고 한다. 좋아하는 일들이나 꽂힌 일들에는 이상하리만치 진심이었지만,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입을 죽 내밀며 그 상황이 끝날 때까지 계속 툴툴대던 그런 아이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좋고 싫음이 명확하게 있던 나는 나이가 들고 현실의 무게를 버텨내려고 할수록 좋고 싫음의 경계가 점차 무너졌다. 지금은 오히려 더 싫음과 덜 싫음 정도의 구분만 짓는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뭘 해도 즐겁고, 늘 해맑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었다. 다만 현실의 벽 앞에서 그런 것들을 하나 둘 놓고 가려고 하다 보니 그런 시절들을 잊게 되는 것뿐이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성인이 되기도 하지만, 어른이 되기도 한다. 어른이란 단순히 나이가 차서 되는 것이 아닌, 본인의 행동에 대해 비로소 책임을 지는 방법을 배울 때 되는 것이다. 이런 책임들은 알게 모르게 하나씩 늘어나고 그로 인해 놓고 가야 하는 것들은 점점 많아진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어렸을 때의 모습을 동경하면서도 막상 그럴 수 없는 무미건조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생각하던 나이. 늘 그 나이가 되면 엄청난 변화가 올 것만 같던 나이 스물, 그리고 서른. 스물이 되면 분명 나를 얽매는 것들이 많이 줄어들고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하며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서른이 되면 나도 내 가정을 꾸려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늘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에게서 느꼈던 그런 행복함을 내 배우자가 될 사람, 그리고 더 나아가 나중에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자식에게까지 늘 경험시켜 주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실상 스무 살의 마법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알아야 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겪어야 할 일들이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결코 줄어들거나 가벼워지지 않았다. 서른이 되면 어렸을 때 생각하던 그 서른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점점 현실을 알게 되고 생각보다 우리 부모님이 대단한 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나이가 들고 철이 드는 느낌인 것일까. 철든다는 것이 사전처럼 단순히 '사리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긴다'는 것 외에도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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