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록을 발견하다)
잠결에 들으니 일찍 일어난 남편이 무언가를 꺼내놓으면서 '당신이 내가 재활용에 섞어 버렸다고 한 노트가 이거였어?' 하는 소리가 웅웅 퍼지면서 들렸다.
아침잠이 없는 남편이 또 무얼 갖고 저러나 하는 생각에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다듬으면서 거실로 나오니 배낭 머리 주머니에서 나왔다며 꺼내놓은, 물기가 마르면서 쭈글쭈글해지고 빳빳하게 굳어있는 노트와 역시 물에 젖었다 말라 서로 뭉쳐져 있는 엽서 덩어리가 보였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혹시 배낭을 잃어버리면 어쩌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긴 여행의 기록을 적은 노트와 엽서들을 넣은 배낭이 다른 곳으로 가서 못 찾으면 어떡하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기내에 들고 탈 수 있는 작은 비닐 백에 그 노트와 엽서 뭉치들을 넣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지친 몸을 누이며 내일 새벽같이 남편이 일어나 배낭이며 여러 물건들을 세탁해 버릴 것만 같아서 애지중지 노트와 엽서 뭉치를 거실 구석 한편에 빼놓았다고 기억했다.
예상대로 다음날 부지런한 남편은 배낭이며 침낭이며 모두 꺼내 세탁해서 널어놓았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아! 노트하고 엽서들이 어디 있지?' 하면서 거실 구석에 내가 두었다고 기억하는 자리를 뒤져보았지만 없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노트와 엽서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을 책망하면서 생각한 자리에 그것들이 없자 정신이 아득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자 아무래도 이것저것 정리하던 남편이 종이류 재활용함에 같이 넣어서 버렸다고 단정했었다. 세탁한 배낭 머릿속은 뒤져볼 생각조차 못한 채. 그때 남편은 억울해하면서 계속 아니라고 했지만 노트를 찾지 못한 나는 어리석게도 남편에게 그 탓을 돌렸었다. 그러면서 그 노트에 대한 생각을 잠시 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고, 재활용 쓰레기통에 함께 버린 남편의 무관심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걷는 산티아고 순례가 아닌 인생의 순례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잊었다.
그런데 그 기록을 몇 년이 지난 지금 상처투성이의 부상병 같은 모습으로 이렇게 만난 것이다. 다행히 잉크가 퍼지긴 했지만 글을 읽을 수 있었다.
2017년 7월 남편이 35년간 한결같이 다니던 직장에서 5년 동안의 임금피크제를 끝으로 정년퇴직했다. 그동안 수고한 남편에게 은퇴하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으니 다시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걷고 싶다고 했다. 첫 번째 산티아고는 2015년 4월 부활절 다음날 출발해서 40여 일간 다녀왔었다.
군 입대 영장을 기다리며 휴학 중인 작은아들과, 환갑을 넘긴 작은 시누이와 우리 부부 이렇게 네 사람이 겁 없이 비행기 티겟을 예약하고, 파리 드골공항에 내렸다. 그리고 파리에서 며칠 머물 민박집을 가기 위해 어렵게 티켓을 사서 전철을 타고 민박집이 있는 쁘렌짱역에서 내렸을 때 우리들은 스스로가 얼마나 대견했었는지 모른다.
배낭의 무게와 걷는 속도가 다른 구성원들이 마음을 붉히고 때론 얼굴을 붉히면서, 물처럼 마셨던 스페인 와인 덕분에 붉어졌던 마음이나 얼굴이 아침이 되면 미소가 되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는 남편의 소망을, 퇴직선물로 받고 싶어 하는 그 소망을 차마 모른 채 할 수 없어 또 가기로 했다.
8월 17일 일산 집에서 새벽 5시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결혼해서 사는 큰아들과 군 제대 후에 2년여의 학업이 남은 둘째 아들 은 모두 서울에서 각기 살고 있는데, 60이 넘은 부모님이 두 달을 계획하고 남들이 힘들거라 손사래 치는 그곳을 또 가기 위해 아침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을, 격려 반 걱정 반으로 배웅해 주러 새벽길을 달려주었다.
25AB에서 에어프랑스를 타고 12시간을 비행하여 파리 드골공항에 내렸다. 비행기 옆좌석에 앉아 알게 된 우연히도 일산에 사신다는 말띠 아줌마의 재미난 여행 얘기를 들으면서, 승무원들이 쉴 새 없이 주는 맛있는 기내식과 와인, 쿠키까지도 놓치지 않고 먹으면서 가다 보니 12시간의 비행시간이 그리 길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바욘행 egjet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공항 내를 걷다가 친절한 안내자 덕분에 여유 있게 비행기를 타고 바욘 비아리츠 공항에 도착해서, 14번 버스 타고 바욘 역(AI) 내려서, 또 버스 타고 민박집에 도착했다.
피곤이 몰려오고 저녁식사도 바욘에서 버스 타기 전 먹었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민박집 어린 꼬마 둘과 수줍게 인사하고 씻고 잠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