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에 감기약을 먹고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가뿐하다. 아직 미열이 있어 약은 계속 먹어야 되겠지만, 아침이 되고 또 떠나 걸어야 하는 순례자의 일과를 시작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자고 일어나 침낭을 익숙한 솜씨로 접어 벨트로 고정하여 배낭에 넣고, 다른 물건들도 빠진 것 없는지 점검을 한 뒤에 기도하고 출발했다.
아침에는 다소 쌀쌀하여, 걷다 보면 옷을 하나씩 벗더라도 톡톡한 재질의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도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직 도시에 깨어있는 사람들은 까미노를 걷고 있는 배낭을 짊어진 순례자들 뿐이다.
사리아 시내로 들어가는 곳에서 본 벽화
사리아 출구 가까이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머문 사람들은 이미 떠나서 한참을 가고 있을 거고, 지금 사리아 시내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입구의 알베르게에서 묵고 오는 순례자들이라 많지 않다.
쾌적한 공기에 조용한 거리의 중심을 지나 사리아 언덕에 이르니 사리아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있어 시내를 너머 보이는 들과 산이 마치 강물처럼 보인다.
사리아 출구 쪽 언덕에서 바라본 정경
언덕 위에 있는 막달레나 수도원을 지나 언덕을 내려가 다시 돌다리를 지나고, 오래된 기찻길을 넘어가니 떡갈나무와 소나무, 너도 밤나무가 가득한 숲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원시림같이 우거지고 이끼가 낀 사리아의 숲길을 구불구불 오르막으로 오르며 걷다가, 아스팔트로 이어진 길을 걸어 작은 마을을 지나, 다시 오르막으로 이어진 흙길을 걷기를 반복하며 계속 오르막길을 걷고 있다.
걷다 보니 한쪽 그늘에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서 지친 발을 쉬게 하고 있는 순례자가 보였다. 발을 쉬게 하면서 생각을 정리해 글도 쓰고 있는 모습이 혼자 순례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고독하면서도 즐거운 특권이 아닌가 생각하며 조금 부러웠다.
작은 마을을 지나며 본 풍경
지난번에 왔을 때는 비를 맞으며 걷느라 사리아를 지나는 길이 예쁘고 좋은지 몰랐는데, 날씨가 좋은 오늘 걸으니 길도 편하고 풍경도 예쁘다. 나무끼리 만들어주는, 푹신한 낙엽이 깔린 나무 동굴이 이어지고 알이 굵은 도토리들이 가득한 길이다.
때로는 돌멩이투성이의 길도 있지만 대체로 완만한 오르막 길이고 넓은 목초지에 노랗게 낮게 피어있는 꽃들도 예쁘다. 이래서 사리아 길이 예쁘다고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2년 전 우리는 사리아 길을 우비를 입고 비를 맞으며 걷느라 제대로 보지 못해,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예쁘진 않았던 것 같다고 했던 말이 무색해지고 미안해진다.
지난번 처음 까미노를 걷고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만난 군인 출신의 70대 초반의 부부가 생각난다. 그분들은 처음 까미노를 걸었을 때 사리아 길이 너무 예뻤던 기억이 있어, 다시 한번 더 걷고 싶어서 두 번째로 왔다고 했다. 이번에는 오비에도를 지나는 북부길을 걸었다고 하면서, 체력이 처음보다 못해서 많이 고생했다는 말을 했었다.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그리고 걷는 사람의 체력이나 감성에 따라 어떤 길은 멋지고, 대단하고, 예쁠 수도 있다는 걸 이번에 까미노를 걸으며 깨달아본다. 자연의 풍경뿐만이 아니라 사람이나 모든 사물의 풍경도 그런 것 같다.
자주 만나서 그 사람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 비해 그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 풍경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어쩌다 한 두 번 본 사람보다는 그에 대한 풍경에 좋은 점수를 줄 수도 있다.
물건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백화점 도자기 코너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었다. 처음 도자기나 생활 자기 그릇을 볼 때 무심히 보이던 물건들도, 자주 만지고 닦고 보면서 새록새록 그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알아가게 되고, 그릇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이 싹트는 걸 느낀 경험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있는 풍경이나 좋아하는 취향들을, 함부로 내 멋대로 판단하고 평가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늦게나마 들었다.
산티아고까지 100km 남았다는 까미노 표지석
오후 1시가 넘어서 작은 마을을 지나 아스팔트 길을 계속 걸어 나가다 돌담 근처에 까미노 푯말이 나왔다. 이제 100km만 가면 산티아고 꼼뽀스뗄라에 도착한다는 표지석이다. 오후의 태양빛에 힘겨워하며 걷다가 발견하니 반갑다.
순례자들의 기쁨의 낙서로 얼룩져있는 표지석을 지나 다시 숲으로 이어지는 오르막 길을 걸어가니 페레이로스 마을이다. 이 마을은 중세의 순례자들에게는 중요한 마을이었다고 한다.
대장간이 많았던 마을답게 망치를 들고 쇠를 연마하는 대장장이 조형물이 있다. 2시가 되어가니 점심을 먹고 쉬었다 가기 위해 마을에 있는 bar에 들어갔다.
다행히 힘들게 올라오는 순례자들을 위해 시에스타 시간인데도 영업 중이었다. 우리는 맛있게 파스타 한 그릇을 비우고 천천히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을 걸어 나왔다.
식사를 하고 조금 쉬어서 그런지 배낭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고 다리도 가뿐하다. 더구나 뽀르또 마린 까지는 계속된 내리막이니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저 멀리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금방이라도 닿을 것처럼 보이는 마을을 향해 내리막을 걸어가는데 그렇게 쉽게 마을에 닿질 않는다.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내리막 아스팔트 길을 굽이굽이 내려오고, 돌담을 끼고돌면서 다시 나무들 곁을 지나 걸어가니 멀리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가 보였다.
뽀르또 마린으로 들어가는 다리
한번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건데 왜 이리 멀고 힘들게 느껴질까? 새로운 길에 대한 두려움이나 기대감이 적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감기로 인해 빨리 피로를 느끼는 걸까? 오늘따라 애타게 목적지가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며 걷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물이 풍성하게 흐르고 푸른 아름다운 뽀르또 마린 마을에 어서 도착되기를 바라며 힘겹게 걷다가 드디어 다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 역시 건기라 물이 바짝 말라 휑한 다리만 먼지에 쌓여 있고 그 풍성하게 많던 강물은 바닥을 보이고 있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숲의 나무들이 먼지에 덮여 녹색을 잃은 모습을 보면서도 왜 뽀르또 마린의 다리 밑에는 푸르게 강물이 흐르고 나무도 싱그러운 색일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쉬운 마음을 추스르며 다리를 건너니 마을로 들어가는 2층 정도 높이의 돌계단이 있다. 그곳을 올라가니 산 빼 드로 성당(Iglesia de San Pedro)의 정면 부분인 문과 종탑이 있다.
중세의 마을인 뽀르또 마린은 1960년대에 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되었고 현재의 마을은 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중세의 순례자들이 건너던 다리는 저수지에 수몰되었고, 산 빼 드로 성당 역시 주민들이 벽돌을 한 장씩 날라서, 성당의 정면 부분만 옮겨서 복원해 놓아 남아있다고 안내책에서 읽었다.
지난번에 비바람을 맞으며 물이 가득한 강물 위를 조심스럽게 건너와서, 이 돌계단에 올라 이곳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을 때도 이런 내용은 몰랐었다. 그저 돌계단 위에서 비에 젖은 아름다운 마을 풍경에 감탄했을 뿐이었다.
산 빼 드로 성당 뒤로 이어진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면, 언덕 위에 비에 젖어 촉촉한 아름다운 마을이 강물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건기에 바싹 마른 강바닥처럼, 마을도 몇 년 사이에 현대적 건물들이 여럿 들어서고, 예전의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던 아름다운 그 마을이 더 이상 아니다.
어쩌면 2년 전에는 비 오는 날 왔기 때문에 지금의 햇살 아래 맨얼굴이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화장했을 때와 화장기 없는 얼굴일 때 전혀 다른 사람을 보듯 놀라는 것처럼 내 마음이 그렇다.
그래도 다리 건너편을 보니 나무들로 둘러싸인 마을이 아름답다. 멀리 보이니 더 그럴 것이다. 아마도 저 건너 마을 쪽에서 이곳을 보았다면 여기도 저만큼은 아름다울 것이라 여기며 알베르게를 찾았다. 찾아간 공립 알베르게는 사람들도 많고 오래되어 낡았다.
우리는 다시 새로 지은 건물에 있는 사립 알베르게로, 순례자 여권에 도장 찍고 계산하고 방으로 올라가니, 방도 넓고 침대도 많이 비어있어 편하게 1층 침대를 차지했다. 샤워하고 빨래해서 널고 쉬다가 마을로 나가 역시 새로 지은 건물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사립 알베르게는 시설은 좋은데 주방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큰 단점이라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도 공립 알베르게를 찾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식사 후에 마을을 구경하다가, 지난번에는 잠깐 머물다 지나가서 미사 참례를 못했던, 산 니콜라스 요새 성당에 들어가려 했지만 오늘은 저녁 미사가 없는지 잠겨있다. 니콜라스 성당도 수몰되기 전의 뽀르또 마린에서 벽돌 하나하나를 옮겨 같은 모습으로 지었다고 한다.
하나 둘 불이 켜진 광장에는 순례자와 관광객들로 가게들이 붐볐다. 광장에 앉아 잠시 생각해 보니 마을이 시간이 갈수록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현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늘 우리처럼 깨끗한 알베르게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낡은 건물들은 낙후된 채 새로운 건물들로 대체되어, 관광객이나 순례자를 받을 것이니, 마을이 변했다고 서운하고 속상해하는 나는 참으로 어리석다.
자기가 직접 걷고 경험했어도 시간이 다르고 기후와 날씨가 다르면 풍경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새삼 또 깨닫게 되었다.
산에 올라갈 때 보았던 꽃 내려올 때 다시 보니 더 예쁘다는 어느 시인의 시어처럼 다시 보니 더 예쁜 것도 있고, 다시 보니 아름다움이 퇴색된 것도 있으니, 세상에 한결같은 모습을 간직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지도 모른다. 그저 그때 내게 들어온 아름다운 기억들을 간직하고 추억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