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함께 허그할까요?

(순례자의 양식)

by 구슬 옥

9월 29일 리곤데(Ligonde) 18km

출발 준비를 하고 마을을 내려오며 바라보니 숲 사이로 안개가 자욱하다. 햇살이 비추면 걷히겠지만 자욱한 안개를 바라보며 걷는 것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게 좋다. 강 위를 지나는 좁은 보행자 다리를 건너가며 주위를 바라보니 강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난 황폐한 모습이 낯설어 보인다.


이제 생각하니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지나온 강들이 왜 시냇물같이 보였는지 이해가 된다. 한강을 보며 살았던 나의 기억에는, 강이면 그 정도가 아닐까 하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작은 강물을 볼 때 강으로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강바닥이 드러난 강을 거의 보지 못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어제 조금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20170929_083007.jpg 뽀르또 마린을 벗어나며 바라본 풍경

다리를 건너 부드러운 흙길과 소나무가 있는 오르막길을 걷게 되었다. 오늘은 해발 400미터에서 700미터의 높이를 완만한 오르막길로 계속 올라가다 내려가는 길이 될 것이다. 소나무가 양쪽에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오솔길을 걷다가, 넓은 목초지 옆으로 걷다가, 나무 하나 없는 등성이를 걷게 되었다.


다행히 오늘은 구름이 많아 햇빛 아래 걷지는 않지만 투명하게 파란 스페인의 하늘을 못 보는 것도 아쉬움이다. 하나가 좋으면 하나가 아쉬운 참으로 맞추기 힘든 마음이다.


20170929_120658.jpg 낮 12시가 넘어 계속된 오르막 능선을 넘는다

능선을 넘어오니 다시 완만한 내리막길로 내려가며 소나무가 오솔길을 만들어주고, 그 옆으로 너른 들판이 펼쳐진 길을 걸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완만하고 길도 흙길이라 걷는 것이 힘들지 않고 지루하지 않다.


우리 삶의 까미노에도 평지와 오르막과 내리막이 항상 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오르막을 오르고 내리막을 걷는지는 모든 사람들이 다르지만 걷게 되는 길은 같은 것 같다.


나는 지금 내리막을 지나 특별하지 않는 그러나 나의 체력에 맞는 평지를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무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주위에서 받게 되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평지를 걷는 지금이 좋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햇살 가득한 공원길을 산책하고, 책을 읽고 조용히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가끔은 어리석었던 시간들에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내 탓이오'를 외치며 작게 가슴을 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평지는 내리막을 내려와야 만날 수 있으므로.

20170929_122529.jpg 가꾸지 않아도 노랗게 가득 피어있는 민들레가 아름답다

작은 시골마을에 들어서니 한쪽에 젊은이들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환영해 준다. 그들도 여행자인지 아니면 현지인 인지는 모르겠다. 부엔 까미노를 외쳐주던 젊은이가 내게 혹시 허그를 해줘도 되냐고 묻는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걸어오는 내가 힘들어 보였는지 '올라'를 외치고 환영을 하다가 진지하게 물어본다. 나는 엉겁결에 '오케이' 하면서 젊은이와 어색하지 않게 허그를 했다. 따뜻한 위로를 느꼈다. 젊은이들은 다시 한번 떠나는 나와 남편에게 '부엔 까미노'를 외치면서 다음에 오는 순례자들을 맞이해 주었다.


울퉁불퉁한 내리막길을 걸어가면서 인상이 푸근해 보이는 내 또래의 여자분이 먼저 자신은 '헬레나'이고 미국에서 남편과 같이 왔다며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반갑게 코리아에서 왔고 '마리아'라고 세례명을 말했다. 헬레나는 내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고 인상적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웃으며 '부엔 까미노'를 외치고 헤어졌다. 남편과 나는 힘들지만 그래도 까미노를 걷는 것이 기뻐서, 항상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고, 특히 함께 걷는 사람들에게도 늘 웃으며 씩씩하게 '부엔 까미노'를 외쳐주니 헬레나에게는 그 모습이 좋아 보였던 거 같다.


내리막 길이 다시 조금 가파르게 오르막으로 이어지고 시간은 오후 2시가 넘어가니 덥고 힘들었다. 다행히 짧은 오르막을 올라오니 마을이 보였다. 우리는 알베르게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한참을 걷다가 리곤데 마을 출구쯤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6유로씩 내고 들어갔다.


근처에 슈퍼도 없이 알베르게 하나만 있을 뿐이라 계속 더 걸을 까 하다가, 다음 마을까지 걷기에는 내가 아직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아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알베르게 역시 주방은 있으나 주방기구가 없어, 저녁 식사는 알베르게 건너편에 있는 유일한 bar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어야 하는데 7시에나 먹을 수 있다고 적혀있다. 시 에스타 시간이 지나 저녁 영업이 시작되는 게 오후 7시부터이기 때문이다. (*시에스타 : 스페인의 낮잠시간 오후 2시~5시까지)

20170929_165827.jpg 리곤데 출구 쪽에 있는 알베르게

2시간을 기다리면서, 알베르게 옆에 있는 아름드리 밤나무에서 아람이 불어 떨어진 밤알을 주워다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낡고 작은 냄비에 삶아서 까먹으니 너무 달고 맛있었다.


함께 묵는 다른 외국인들에게도 먹어보라고 주니 잘 먹는다. 까미노를 걷는 것이 힘들면서도 숙소에서 쉬면서 외국인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뭔가를 나누어 먹고 하는 것이 그런대로 즐겁고 새롭다.


까미노를 걸으며 길에 지천으로 떨어지는 밤을 주워서 까먹고 삶을 수 있다니 ㅋㅋ 다람쥐가 다 되었다. 그런데 여기는 이상하게 다람쥐를 볼 수가 없다. 먹을게 지천인데.. 걷다 보면 길 한쪽은 익은 밤송이들이 절로 벌어져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밤나무가 유난히 많다).


도토리도 숲길을 걸을 때 너무 많이 떨어져 있고, 사람들의 발에 깨어져 있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하도 많이 주워가서 다람쥐나 다른 동물들의 겨울 식량이라고 줍지 마라고 홍보까지 하는데, 여기는 순례자들 외에는 마을에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아서, 그런 걱정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걸어가면서 밤을 줍는 사람들도 가끔은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간다. 나도 처음에는 줍지 않고 지나갔는데 발에 밟혀 깨어진 밤들을 보니 너무 아깝고 안타까워 줍기 시작했다. 잠깐만 걸으면서 주워도 금방 한 봉지가 가득했다.


배낭도 무거운데 그것까지 뭐 하러 갖고 가느냐고 야단치는 남편의 지청구를 들으면서도 버릴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과 나눠서 먹는다고 가져가지만 선뜻 받는 사람이 별로 없다. 밤 먹는 걸 모르나? 아니면 동물들의 먹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큰 도시 위주로 쉬는지 우리하고는 만나기가 힘들어 주운 밤 처리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삶아서 갖고 다니면, 걸으면서 잠깐씩 쉴 때 훌륭한 간식이 되어주어, 우리는 밤을 순례자의 양식으로 주신 것이라고 말하며 기쁘고 맛있게 먹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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