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서쪽 끝 땅)
10월 5일 피스 떼라(Fisterra)
습관처럼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2인실이라 다행이었다. 우리는 뽀송뽀송한 각자의 침낭을 잘 개서 배낭에 넣고 다른 물건들도 빠짐없이 정리한 후 주방으로 내려가 아침을 간단하게 만들어 먹고 늘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배낭을 메고 알베르게를 나왔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부엔 까미노' 인사를 안 하니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이다. 오늘도 세 번째로 걸어온 많은 수의 한국인들을 별로 만나지 못했다. 아무래도 새로 지은 도심의 알베르게로 다들 간 것 같았다.
알베르게를 나서며 다시 이곳을 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오래된 수도원의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인 건물의 외관을 눈에 담으며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어제 답사를 해놓아서 헤매지 않고 걸어갔다. 걷다가 라바날에서 같이 식사했었던 미스 최(최여사)를 만났다.
그녀도 연령이 우리와 비슷하다 보니 걷는 속도나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오늘도 우리처럼 버스 타고 피니스 테 라에 간다고 했다. 배낭은 정리해서 어제 한국으로 보내고 작은 캐리어를 사서 끌고 옷도 여행에 어울리는 옷으로 까르프에서 사서 입었다고 하면서 산티아고를 걸어온 한국의 젊은이들도 여러 명 그렇게 한다고 얘기했다.
우리는 2년 전에 포르투와 마드리드 여행을 하면서도 까미노 복장을 하고 다녀 초라하고 어색해 보였는데 미스 최의 얘기를 듣고 보니 아~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하면서 감탄했다. 그녀는 우리와는 달리 화사한 복장에 캐리어를 끄는 모습이 완전한 여행객 모습이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아닌 장소에서 버스를 타야 돼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약간 초조했는데 다행히 버스가 와서 잘 타고 피니스 테라에 도착했다. 여기도 알베르게가 있고 순례자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준다. 카미노에서처럼 숙박비가 저렴하지는 않지만 2인실에서 잘 수 있다. 우리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여기저기 호객하는 사람들이 있다.
숙박하려는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모셔가려고 야단이다. 카미노에서의 분위기는 없고 그저 관광지다.
항구에 작고 큰 배들이 줄에 매여있고 갈매기가 날고 짙은 파란색의 바닷물이 일렁이는 작은 해안 마을이다. 우리는 한 아주머니를 따라 이리저리 동네를 지나 약간 오르막에 있는 작은 알베르게에 들었다.
숙소에 배낭을 두고 물만 챙겨서 카미노 0포인트가 있고, 대서양의 절벽가에 세워진 피니스 테라 등대가 있는 곳을 향해 4km 정도를 걸어갔다. 한낮의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도로를 따라 걸어가며 순례자의 동상을 지나 까미노 0포인트 표지석 앞에 도착했다.
유럽 대륙의 서쪽 끝(피니스) 땅(테라)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오랫동안 걸으며 지친 순례자들이 대서양을 바라보며 마지막 의식으로 자신들이 신고 걸었던 신발 등을 태우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런 의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동안 우리와 함께 걸었던 신발을 벗어 바위에 올려놓고 앉아서 수고한 두발을 따뜻한 햇살에 일광욕시켰다.
유럽 대륙의 서쪽 끝의 땅에 있는 절벽에 앉아서 40여 일이 넘도록 순례길을 걸어 완주한 기쁨을 대서양을 바라보며 만끽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주위에 다른 외국인들도 나름의 기념식을 하고 있었지만 신발을 태우는 사람들은 다행히 없었다.
등대 옆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내려오다 배낭을 멘 채 땀을 흘리며 걸어오는 이*윤 씨를 만났다. 멜리데 알베르게에서 헤어진 지 며칠 만에 다시 보니 반가웠다. 레저용 안경을 끼고 수염이 덥수룩하고 땀에 젖은 그를 나는 한눈에 발견했으니 참 신기했다.
우리는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우리와 달리 연예인인 그는 말끔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어 걱정하면서도 흔쾌히 사진을 찍어준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한편으론 나이 든 남편이 아이들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 것이 주책스럽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길에서 만난 인연이 반가워 그랬으니 추억으로 받아들였다.
해안가 식당에서 갈리시아 지방의 특산물인 생선요리를 점심 겸 저녁으로 먹고 일몰시간에 맞추어 해안가를 한 바퀴 도는 유람선을 예약하고 기다리다 배를 탔다. 한국인들은 우리 둘 외에는 없고 가족끼리 여행 오신 분들인지 모두 외국인들이다.
승선하고 배가 출발하니 선원이 와인과 간단한 음식을 건네준다. 달달한 와인과 카나페를 먹으며 서로 인사하면서 대서양을 가르는 물길을 따라 해안가를 돌았다. 갑판 위로 나가 바람을 맞으며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며 넘어가는 노을을 바라보고 선장이랑 선원들과 인사하면서 순례길 완주 뒤에 멋진 휴식을 갖게 하신 그분께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