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프롤로그

by 삼전글방

목차


프롤로그 숫자 5의 위험한 마술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1 / ‘5고초려’와 ‘5개월’의 힘


Part 1 생각이 행동을 바꾼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보복침공 /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 작은 촛불을 켜라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2


Part 2 나이테가 늘수록 나무는 튼튼해진다

로버츠 등반대, 히말라야를 정복하다 / 오고초려, 다시 시작되다 / 하치의 충심도 생존의 문제였다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3


Part 3 행동은 습관을 만든다

삼겹살집의 도원결의 / 실행은 복리로 수익을 돌려준다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4


Part 4 미래에 대한 매력적인 그림을 그려라

직선도로와 우회도로 / 반응성 애착장애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5


Part 5 습관이 되어야 변화는 완성된다

살얼음판 위의 스케이팅 / 따또빠니를 위한 성공의 아침 / 닭들의 회의를 멈춰라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6


Part 6 습관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

물 타기 작전 / 백야를 부르는 승리, 혹은 향수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7


에필로그 습관은 운명을 만든다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8




프롤로그 숫자 5의 위험한 마술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1

선배님께.

몇 번의 메일을 보내고서 어색하기도 하고 계면쩍기도 했습니다만 이제 한결 익숙해졌네요. 전화가 있습니다만 이렇게 글을 쓰니 정리가 잘 되고 정감도 생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그 전에도 말씀은 드렸지만 선배님이 사시는 장호원(長湖院)이라는 지명이 제게 이토록 명징한 고유명사로 다가올지는 몰랐습니다. 삶이 버겁고 힘들 때마다 선배님 생각이 간절해지고 덩달아 장호원이 마음의 고향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장호원에 갔던 날, 복숭아나무 옆에 배나무를 함께 심어 연분홍빛을 띤 복숭아꽃과 하얀색 배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더군요.

저는 지금 경희를 겨우 재우고 서재에 앉아 컴퓨터를 켰습니다. 아, 선배님께 말씀을 드렸던가요? 제가 한 달 전에 입양한 딸아이의 이름이 경희랍니다. 아이를 입양하는 절차가 그토록 까다로운 일이었다면 아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제가 대기업 라만차식품에 다닌다는 게 입양기관의 의심을 걷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괜한 자랑만 늘어놓았군요.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저의 입장은 지금 사면초가라는 말이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대기업 마케팅 과장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만 달고 있을 뿐입니다. 사고도 여러 번 쳤지요.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기능성 음료 히말라야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히말라야는 고대 산스크리트의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의 두 개 낱말이 결합된 복합어죠. 기능이 미비하기는 하지만 암과 비만 억제 효과가 있다는 음료였는데 제가 마케팅 담당자였어요.

물론 처참할 정도로 실패를 했습니다. 나중에 경영 평가가 있었는데 한 50억 원의 피해가 집계되었더군요. 피해 액수가 5억 원 정도에 머물렀다면 저는 아마 해고를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피해가 크니까 기가 막혔나 봐요. 회사에서는 저를 자르지는 않았지만 요주의 인물로 낙인을 찍더군요. 본사가 있는 영국에서는 어마어마한 히트를 쳤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안 먹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지금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입니다. 기획안 때문이죠. 지금 말씀드린 기능성 음료 히말라야에 관한 론칭 기획안을 내일 제출할 생각인데 회사에서는 지금까지 네 번이나 퇴짜를 놓았습니다. 저도 사실 잘한 것은 없어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음료에 대한 기획안이니 받아줄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절대긍정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자신을 믿습니다. 절대긍정은 곧 자기긍정이 아니겠습니까?

어쨌거나 저는 처음 낸 기획안이 퇴짜를 맞았을 때 감정을 추스르고 내용을 보완하여 2차로 제출했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케팅 부장은 여지없이 빠꾸를 놓더군요. 그래서 저는 야마가 돌았습니다. 때문에 기획안을 3차로 제출할 때는 토씨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냈습니다. 기획안을 살펴보던 부장은 역시 퇴짜를 놓으며 눈을 부라리더군요. 결국 저는 이번에도 4차 기획안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고스란히 제출했습니다. 부장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기획안을 얌전하게 되돌려 주더군요.

선배님, 저는 지금 사직서를 썼습니다. 내일은 사장까지 배석하는 기획회의가 있는 날이거든요. 물론 저는 5차 기획안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제출할 생각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누구에게나 선택의 가능성이나 기회는 열려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라도 밀고 나가야지 겁을 먹고 아무것도 안 한다면 기회나 가능성을 제 스스로 닫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 열 받네.

언젠가 들은 얘기인데 고슴도치 콘셉트라는 게 있다고 하더군요. 여우는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세상의 복잡한 면면을 두루두루 살피지만 고슴도치는 몸을 공처럼 움츠리듯 단 하나의 체계적인 개념이나 기본 원리로 단순화 한다는 것이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는 여우가 될 수 없는 인간인가 봅니다. 그냥 단순한 고슴도치 콘셉트가 좋거든요. 그냥 밀고 갈 생각입니다. 아니면 사표를 던지면 그만이죠. 어차피 저는 지금 막판이거든요.

너무 고상한 소리만 해댔나요? 신세한탄만 하다 보니 글이 길어져 버렸네요. 아닌 게 아니라 가족들 때문에 걱정입니다. 새로 입양한 딸아이도 적응이 잘 안되는지 응석이 심해졌다고 아내가 그러더군요. 가족에 대한 책임이 막중하니 마음속이 자갈밭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이고, 얘가 우네요. 경희가 자다 깼나 봅니다. 가봐야겠군요.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석현우 올림.


‘5고초려’와 ‘5개월’의 힘

핸드폰에서 모닝콜이 울린다. 석 과장은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얼른 버튼을 눌러 소리를 잠재운다. 아내와 딸아이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한 달이 지났으면 친해질 법도 한데 아내와 딸아이는 여전히 서먹서먹한 상태다. 아이의 방에 침대를 마련해 주었지만 아이는 석 과장과 아내 사이에서 자겠다고 고집했다. 아내는 아이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그 방법도 좋겠다며 허락했다. 그렇지만 아이는 잠자리에서도 몸을 석 과장에게 바짝 기대어 잠들었고 한사코 아내와 거리를 두었다. 입양기관에서는 아이가 일 년 동안 두 번이나 파양(罷揚)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석 과장은 안쓰러워 아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쓰다듬는다. 어두워서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가볍게 미소를 짓는 것 같다.

그는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켠 후 화장실로 향한다. 결전의 날이다. 오늘은 사장까지 배석하는 마케팅 기획회의가 있는 날이다. 사장은 일 년 중 반은 한국에서 살고, 반은 본사가 있는 영국 런던에 머문다. 시기로 봐서는 영국에 머물 시간이지만 최근 한국에서의 음료판매 부진이 그를 한반도에 머물게 했을 것이다. 화장실에 들어선 그는 세면대로 다가가 물을 튼다. 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고 거울을 바라본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사내가 거울 속에 서있다. 회의에 사장까지 배석한다면 오늘은 한 발 물러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 소나기는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니다.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고 성공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똑같은 어려움이라도 나의 선택에 따라 그 의미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는 차라리 오늘 결판을 보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바꾸자 거울 속에서는 자심감이 넘치는 표정의 사내가 웃고 있다.

“이것으로서 오늘 마케팅 기획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를 맡았던 마케팅 김 부장이 회의를 마치는 멘트를 날린다. 회의 내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사장의 표정은 어둡다. 신제품에 대한 계획도 없었고, 기존의 제품으로는 올 여름 시장의 선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다 아는 눈치였다. 석 과장은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마케팅부 석현우 과장입니다. 기획안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석 과장이 말을 꺼내자 마케팅 김 부장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사장의 표정은 밝아진다.

“뭔가? 가져와 보게.”

석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획안을 들고 사장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순간 사장의 눈길과 마주쳤는데 그의 눈에는 온화한 기운이 서려 있다. 석 과장은 사장에게 기획안을 건넨다. 사장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기획안을 받아든다.

“기능성 음료 히말라야 재론칭 기획안?”

사장은 기획안의 제목을 읽어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그리고는 마케팅 김 부장을 돌아보며 말한다.

“이게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네 번이나 제출했다는 그 기획안인가?”

“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김 부장과 석 과장의 입에서는 동시에 말이 튀어나왔다. 긍정의 말은 김 부장이고, 부정의 말은 석 과장이다.

“아니라고?”

“예.”

“뭐가 아냐? 김 부장은 맞다는데.”

“한 번은 수정했습니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터졌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던 김 부장도 썩은 미소를 짓는다.

“히말라야는 작년에 이미 죽은 제품인데 가능하겠어?”

“인증마크만 확보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사장은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지 입을 다물고 헛웃음을 날린다. 침묵이 잠시 흐른다. 갑자기 사장은 손으로 가슴을 더듬는다. 그는 와이셔츠 앞주머니에 꽂혀 있던 만년필을 뽑아들더니 뚜껑을 열고 결재란이 아닌 기획안의 전면에 커다랗게 사인을 하며 말한다.

“어디 자네 맘대로 해보게. 자네 맘대로 해봐.”

그러더니 사장은 벌떡 일어나 회의실 출입문으로 향한다. 사장이 일어서자 간부급들도 서둘러 일어나 사장의 뒤로 따라붙는다. 부동자세로 서 있던 석 과장은 우두커니 회의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기획안을 내려다본다. 그러다가 사장과 간부들이 빠져나간 출입문 쪽으로 눈길을 옮긴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로비에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 사람들이 몰려 있다. 마침 사장이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가면서 던진 말이 석 과장의 귀속까지 파고든다.

“살다 살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냐.”

석 과장은 회의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기획안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든다. 그러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친다. 석 과장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어린아이처럼 깜짝 놀란다. 돌아보니 라만차식품중앙연구소 조용원 소장이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다.

“오랜만일세. 나랑 차나 한 잔 할 수 있겠나?”

“아, 그럼요.”

조 소장과 석 과장은 전체 회의실을 빠져나와 소회의실로 향한다. 각자 커피가 들어 있는 종이컵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마주 앉는다.

“오고초려가 먹혔군. 축하하네.”

“너무 무리를 한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송구합니다.”

“아냐, 아냐. 세상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거야. 잘했어. 내 속이 다 시원하더군.”

“사실 겁먹고 있었습니다. 김 부장님께도 죄송하고요.”

“김 부장도 이해는 할 거야. 이 건으로 내게 문의를 해왔었거든.”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 김 부장도 확신은 있었는데 아마 자신이 없었을 거야. 자네가 밀어붙이니까 속으로는 나처럼 흐뭇했을 걸?”

“그런 줄도 모르고 속을 태웠군요.”

“문제는 이제부터지.”

“아, 네.”

“그렇다고 겁먹지는 말게. 자네는 당당히 싸워 돈키호테 사장의 사인을 받아냈네. 기쁨을 만끽해도 좋아. 삼 세 번도 아니고 오고초려가 아니었나. 하하하.”

“괜한 말씀이십니다.”

“물론 주의해야 할 것도 있겠지. 지금 자네의 태도가 일관성을 잃으면 역풍이 심해질 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는 게 명쾌하고 명료하고 단순해서 좋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반발이 많을 것이란 얘기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예. 잘 알겠습니다.”

“태도를 분명히 하게. 흔들리지도 말고.”

“그럼요.”

“자네 입사면접시험 때 내가 면접관이었다는 거 기억하나?”

“아, 그럼요.”

“자네는 눈빛이 살아 있었어. 면접관인 내게 명함을 한 장 달라고 말한 게 어이가 없었지만. 그때는 왜 그랬나?”

“글쎄요. 저의 신분은 다 아시는데 저는 소장님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어서 억울했습니다. 명함을 달라고 하니까 흔쾌히 주시더군요.”

“그래. 그랬어. 나는 직원을 뽑을 때 좋은 대학, 많은 자격증, 전문적인 지식, 일에 대한 경험보다도 품성에 중점을 두고 선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네. 물론 배경이나 지식이나, 경험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닐세. 그런 것은 교육을 통해 쉽게 배울 수 있지만 성격이나 태도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지능, 책임감, 가치관 이런 것은 타고난 면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네. 자, 현실적인 얘길 해보세. 히말라야 재론칭의 핵심은 무언가?”

“과학적 인증입니다. 영국 라만차에서도 시도했었습니다만 의사협회 같은 곳으로부터 인증 마크를 받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작업했을 때는 그 점을 간과한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좋아. 찾다보면 방법은 나오겠지. 문제는 확신이 있느냐는 얘기야.”

“자신 있습니다. 어차피 제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음료고, 영국에서도 통했는데 우리나라라고 해서 먹히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좋아. 자네의 그런 자신감이 좋아. 고슴도치 콘셉트라고 들어 봤나?”

“예, 압니다.”

“그 점도 마음에 드는군. 좋은 회사에서 위대한 회사로 발전한 기업들이 그들만의 고슴도치 콘셉트를 확고히 하기까지는 평균 4년이 걸린다고 하네. 이번 론칭 기획안을 마무리하는 기간을 얼마로 잡고 있나?”

“4~5개월이면 충분합니다.”

“좋아. 아무래도 나는 연구소장이니까 이번 일에 이래저래 관련이 될 걸세. 한 번 잘 해보세.”

조 소장은 그렇게 말하고서 잠시 침묵을 지킨다. 화제가 궁색해진 석 과장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이윽고 조 소장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4~5개월이면 충분하다?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나봐, 옛날이야기나 해대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충고 감사드립니다.”

“아니, 지금까지 한 얘기 때문이 아니고 문득 옛날 생각이 났거든.”

“옛날 생각이요?”

“그래. 아까 자네가 사장 앞에서 고집을 피울 때 옛날에 그만 둔 마케팅 정 부장 생각이 났거든. 예전에는 해고대상자의 책상과 의자를 사무실 출입구 쪽으로 옮겨놓았었네. 물론 그 사람에게는 어떤 보직도 없고, 어떤 일도 주어지지 않았지. 알아서 나가라는 얘기였으니까.”

“정 부장님이 그런 상황에 처하셨다는 얘긴가요?”

“머리 회전이 빠르군. 그렇다네. 정 부장은 실수가 많았어. 운도 없었고. 그러니 해고대상자에 올랐고 어느 날 출근해보니 자신의 책상과 의자가 사무실 출입문 앞으로 이동해 있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나.”

“정 부장님은 바로 사표를 쓰셨나요?”

“아니야. 그 친구도 꽤 뚝심이 있는 물건이었거든. 웬만한 사람들은 길어야 한 달 정도 버티다가 사표를 내고 사라지곤 했는데 그 친구는 그러지 않았어.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면서 다섯 달을 버텼으니까.”

“다섯 달이 지난 후 사표를 내셨다는 거네요?”

“그래. 정확히 다섯 달이었어. 다섯 달이 지난 다음 날, 정 부장은 사표를 내더니 사장한테 한마디 하는 걸 나는 옆에서 똑똑히 들었네. 전날이 딸의 결혼식이었다고 하더군.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화장실로 가서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네. 그 친구는 결혼하는 딸에게 실업자 아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야.”

“…….”

“돈키호테 사장도 아까 그 순간에 틀림없이 정 부장 생각을 떠올렸을 거야. 그 일을 계기로 그런 제도가 없어졌거든.”

조 소장은 말을 마친 후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어쨌든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구소로 찾아오게.”

조 소장은 소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석 과장은 생각이 복잡해져 머리를 가볍게 흔든다. 오고초려와 5개월이라.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5개월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기획안을 노려본다. 사장의 사인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아울러 기획안의 제목이 명징하게 그의 눈으로 들어왔다.

‘기능성 음료 히말라야 재론칭 기획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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