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생각이 행동을 바꾼다
목차
프롤로그 숫자 5의 위험한 마술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1 / ‘5고초려’와 ‘5개월’의 힘
Part 1 생각이 행동을 바꾼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보복침공 /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 작은 촛불을 켜라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2
Part 2 나이테가 늘수록 나무는 튼튼해진다
로버츠 등반대, 히말라야를 정복하다 / 오고초려, 다시 시작되다 / 하치의 충심도 생존의 문제였다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3
Part 3 행동은 습관을 만든다
삼겹살집의 도원결의 / 실행은 복리로 수익을 돌려준다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4
Part 4 미래에 대한 매력적인 그림을 그려라
직선도로와 우회도로 / 반응성 애착장애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5
Part 5 습관이 되어야 변화는 완성된다
살얼음판 위의 스케이팅 / 따또빠니를 위한 성공의 아침 / 닭들의 회의를 멈춰라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6
Part 6 습관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
물타기 작전 / 백야를 부르는 승리, 혹은 향수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7
에필로그 습관은 운명을 만든다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8
Part 1 생각이 행동을 바꾼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보복침공
“어이, 돌 과장! 나랑 얘기 좀 하세.”
마케팅 김 부장이 점심을 먹고 오는 길인지 이수시게를 입에 물고 다가온다.
“히말라야는 준비하고 있나?”
“예, 지금 일정표를 짜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게 뭐 있나? 사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돌처럼 단단한 자네의 의지였는데 왜 이제 와서 약한 모습을 보여. 죄송하면 취소할까?”
“아닙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영국 본사에다가 히말라야 론칭 기획안, 결과보고서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자료를 요청했으니까 기획실에서 받아다가 검토하고 내용 보고해. 작년에 영국하고 우리나라하고 동시에 출시했지? 작년에 론칭 담당이 누구였더라?”
“예. 저였습니다.”
“맞아. 왜 아니겠어요. 어쨌든 돌 과장님, 나 아직 안 죽었거든요. 다음에 또 그렇게 사장님 앞에서 오버하시면 그땐 정말 내 손에 죽는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회의 소집해. 부원들 모아놓고 간단하게나마 취지를 설명이라도 해야 도와줄 거 아냐.”
“감사합니다.”
김 부장은 과장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을 한다. 석 과장은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액정화면에서 발신자를 확인한 후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른다.
“응, 나야.”
“여보, 통화해도 괜찮아?”
“응. 지금은 괜찮아. 왜, 경희 때문에?”
“예전에 파양한 강아지랑 똑같다니까.”
“야, 박지영!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랑 강아지랑 똑같냐? 너, 정말…….”
“당신 출근한 후부터 계속 저러고 있어. 내 눈치만 살살 보고 어두운 방에 처박혀 나오지도 않는다니까. 옛날에 보내버린 해피랑 똑같아, 미치겠네.”
“바빠서 안 되겠다. 자세한 얘기는 집에 가서 하자고. 끊어.”
석 과장은 얼른 핸드폰을 끊어 버린다. 아닌 게 아니라 아내는 죽을 맛일 것이다. 결혼 후, 아내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 보약도 수없이 먹고, 심지어 시험관 아기라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마어마한 비용만 축내고 말았다. 팔자려니 생각하고 아내에게 애완용 푸들을 선물한 게 작년이었다. 처제가 키우던 푸들이었는데, 아내의 상황을 잘 아는 처지라 순순히 양보했다. 히말라야 론칭 문제로 골머리를 썩던 때라 기억이 생생했다. 아내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해피 때문에 직장에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해피는 소파 밑에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처제로부터 개가 두 번의 파양한 경험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석 과장은 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개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갔다. 수의사는 해피가 분리불안을 느끼는 탓이라고 했다. 보통의 개라면 사람과 금방금방 친해져야 하는데 해피의 경우 파양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탓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진돗개의 경우도 주인과 떨어지면 분리불안을 심하게 겪는데 그래서 먼 곳에 있는 주인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수의사는 엉뚱하게도 해피에게 수술을 권했다. 푸들의 경우 선천적으로 관절이 약하다는 것인데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걸로 보아 심각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수술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해피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해피는 주인인 처제에게로 돌아갔다. 아내는 적지 않은 수술비용에 울상을 지었고, 생활이 궁핍한 처제는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수술비용을 분담하겠다고 했지만 석 과장이 그것을 거절했다. 석 과장은 아내에게 좋은 일을 한 셈으로 치자고, 우리는 반드시 복 받을 것이라고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석 과장은 인터넷을 열고 영국의 일간지를 뒤지기 시작한다. 히말라야의 관련 자료가 도착하기 전까지 여러 가지 정보를 확인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그는 유럽의 물값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의 껌 값에 해당한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유럽에서는 물이 귀했다. 영국에 연수를 갔을 때도 그랬고, 신혼여행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도 물은 이동 중에 늘 사먹어야 했다. 유럽에는 저혈압 환자들이 많고, 진저리를 칠 정도로 음식도 지나치게 짠데 이는 물과도 관련이 있는 듯이 보였다. 아무래도 저혈압 환자들에게는 자극적인 음식이 보편적일 터였다. 물의 가격은 그리 비싸지는 않았지만 가는 곳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유럽의 물에는 석회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한국 사람들이 멋모르고 마셨다가는 배탈이 나기 일쑤였다. 석 과장도 영국에 갔을 때 수돗물을 마셨다가 바로 설사가 쏟아져 애를 먹었었다.
유럽에서 파는 물로는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에비앙이 대표적인데 가격이 좀 비싸다는 게 흠이고, 꽁트레, 빼리에, 비텔, 볼빅 등도 알려져 있었다. 빼리에는 영화나 소설에도 자주 등장한다는데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즐겨먹는 탄산수다. 석 과장은 여행을 하는 동안 꽁트레가 어디를 가나 구하기도 쉽고 가격이 가장 저렴해서 즐겨 마셨다.
라만차의 히말라야가 다른 물값에 비해 평균 다섯 배나 비싼 데도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암과 비만의 억제 효과가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두말할 나위가 없었고, 그것이 진실이었다. 늘 먹는 물에 기능성을 확보한 셈이었고, 효과는 만점이었다.
‘라만차의 히말라야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보복 침공이다’
석 과장은 영국 일간 신문의 한 기사 헤드라인에 눈길이 멈춘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스페인 함대의 보복 침공이라니. 영국과 스페인이 전쟁을 했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 주장인 데다가 옛날 고리짝에나 들어본 무적함대는 또 무슨 말일까. 그는 기사를 프린트한다.
영문을 해석하고 나자 석 과장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기자는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라만차 히말라야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 키호테』를 연상시킨다는 것이 주요 핵심이었다.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를 쓴 배경과 주인공의 의미하는 상징을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돈 키호테는 16~17세기 스페인 사람의 전형인데 스페인 제국의 영웅주의와 비참한 패배를 상징한다는 말은 그런대로 들어줄만 했다. 스페인이 16세기 초까지만 해도 네덜란드, 포르투갈, 동남아, 심지어 아메리카까지 정복하여 광대한 영토와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었는데, 155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의해 참패를 당하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소설가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라는 주인공을 통해 스페인 제국의 말로를 상징하고 있다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기자가 소설 속에 나오는 돈 키호테의 고향인 ‘라만차’라는 지명에 기업 ‘라만차’와 비교하면서 악의적인 해석을 대입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라만차가 스페인 기업도 아닌데 소설 속 지명과 회사의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은 그 배경이 의심스러웠다. 결국 라만차 기업의 성공은 영국에 대한 스페인 무적함대의 복수라는 주장이니 웃지 못할 장난에 불과했다.
그러나 장난은 장난에 머물지 않았다. 석 과장이 그 이후에 게재된 기사를 살펴보니 꽤 심각했다. 잉글랜드 라만차에서 정정 기사를 요청하는 과정도 그렇거니와 시민단체, 그리고 또 다른 신문사와의 갈등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게재된 영문 기사의 양이 워낙 많아 일일이 해석하기가 버거웠다. 그러고 보니 오후에 회의를 소집하라는 김 부장의 말을 깜박했다는 것을 떠올린다. 석 과장은 기획안을 복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복사기 앞으로 달려간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지금 석 과장님의 말씀은 인증마크를 따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게 핵심인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습니까?”
이 대리의 말투는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사건을 깨 묻는 검사의 어조를 닮아 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은 그렇다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좀 무책임한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누가 상사고, 누가 부하직원이란 말인가. 석 과장은 속이 끓어올랐으나 내색할 수는 없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제게는 작년에 국내에서 실패한 분석 자료는 있으나 영국 라만차에서 성공한 자료는 아직 도착하지 않아 상충하는 문제를 분석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히말라야에 대한 성공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너무 단순하고 위험한 생각입니다. 한국에서 히말라야에 대한 검증은 이미 작년에 끝난 상태이고, 더군다나 입체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이 없이는 실패할 게 뻔합니다.”
“야, 이 대리! 누가 상사고 누가 부하직원이냐?”
김 부장이 고함을 지르지 않았다면 석 과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 대리의 멱살이라도 잡을 판이었다.
“대안 없는 비판은 비난이라는 거 몰라? 회의 시간에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잔 말이야. 어차피 이번 히말라야 재론칭 건은 사장님께서 재가한 사항이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문제라고.”
“제가 좀 흥분한 것 같습니다. 부장님, 그리고 과장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 대리는 영국에서 히말라야 건에 관여했다고 들었는데, 맞아?”
“그렇습니다.”
“그럼 잘됐네. 두 사람이 호흡을 좀 맞춰 보라고.”
석 과장은 이 대리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론칭에 대한 입체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하자면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석 과장도 분명히 알아 둘 게 있어. 이번 재론칭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석 과장 혼자 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
“이 사람이 지금 장난하는 줄 아나, 왜 대답이 없어?”
“예, 알겠습니다.”
“지금 일정표를 보니까 5개월 후에 제품 출시야. 어디 지켜보겠어. 회의 끝.”
김 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직원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석 과장은 마음이 무거워져 의자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기댄 채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부장은 한마디 더 거들까 하다가 그냥 회의실을 빠져나간다.
회의실에 혼자 남게 된 석 과장은 한숨을 길게 내뿜는다. 입사 후, 가장 잘나가던 시절은 언제였을까. 그동안 회사에서 겪은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스낵, 아이스크림, 음료 등 안 맡아본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나마 석 과장은 가장 자신 있는 품목이 음료였다. 식품업체에 입사하는 직원들의 가장 큰 꿈은 사장이 되는 것이고, 두 번째 꿈은 자신이 맡은 제품이 공전의 히트를 치는 것이다. 석 과장도 예외일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잘한 일도 많았다. 그러나 히말라야는 그에게 가장 자신 있는 품목이었지만 가장 큰 시련을 안긴 제품이었다. 그래서 오기도 품고 똑같은 기획안을 다섯 번이나 내질 않았던가.
히말라야를 통해 최고가 될 수 있을까. 일단 이 문제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했다. 석 과장은 천 번도 만 번도 더 반문했던 질문을 다시 던진다. 히말라야를 통해 최고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관한 믿음이 최우선 과제다. 냉정히 돌아보자. 영국에서 최초로 히말라야를 제안한 사람은 사장이다. 한국에서 동시에 시판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사장이다. 그렇다면 그리 겁먹을 일도 아니지 않은가. 성공을 통해 승진이나 돈을 버는 것은 바라지도 않으나 어차피 성공하지 못하면 해고가 기다리고 있다. 이 문제는 이제 패스. 그러면 나는 이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조 소장이 말한 것처럼 퇴사한 정 부장이 5개월의 굴욕을 참았듯이 나도 내 몸을 던지면 5개월만으로 시간은 충분하다.
마음이 가벼워진 석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런데 그때 바지주머니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느껴진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액정 화면에서 발신자를 확인하곤 통화 버튼을 누른다.
“어, 나야.”
“여보, 통화해도 괜찮아?”
“그럼. 안 그래도 전화를 하려던 참이야.”
수화기 속에서는 경희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다. 아이가 또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지금 경희랑 통화 좀 할 수 있어?”
“그래. 바꿔봐.”
울던 아이가 전화를 받는다.
“경희야, 아빠다.”
“아빠야?”
“그래. 아빠야. 너 왜 울어?”
“아빠, 엄마가 무서워.”
“경희야, 엄마가 왜 무서워? 엄마가 때렸어?”
“엄마가… 엄마가… 엄마 무서워.”
아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서럽게 운다.
“경희야, 경희야. 대답해봐, 경희야.”
“응. 아빠.”
“아빠가 지금 가서 엄마를 혼내줄게. 울면 안 돼. 알았지? 엄마 바꿔줘.”
“응, 나야.”
“얘를 때린 건 아니지?”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아는데 어쨌든 우리가 생각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아.”
“무슨 생각?”
“어쨌든 지금 퇴근할 테니까 집에서 얘기 좀 하자.”
석 과장은 핸드폰을 끊고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회의실 안이다. 아내는 계속 아이를 키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모양이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석 과장은 아내와 자신이 뭔가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떤 승산도 없다고 판단한다. 아내와의 전환적 대화를 시도하자고 다짐한다.
작은 촛불을 켜라
“야, 석현우!”
석 과장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으로 향해 걷다가 뒤를 돌아본다. 누군가 했더니 입사 동기인 박찬호다.
“찬호박! 아, 박 차장님!”
“동기끼리 왜 그러냐? 퇴근하는 길이야? 괜찮으면 생맥주나 한잔하던가?”
“아, 그래. 그런데…… 그래. 간단하게 하지 뭐.”
박찬호는 기획실 차장이다. 석 과장의 입사 동기 중에서는 가장 잘나는 인물이다. 이름이 프로야구선수와 같아서 누구나 찬호박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는 처음 만나 자신을 소개할 때부터 스스로 찬호박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석 과장은 한때 박 차장의 빠른 진급과 출세 때문에 열등감에 휩싸였다. 혼자 가만히만 두어도 자신은 보통은 가는데, 남에게 비교를 당해서 상대적으로 형편없어지거나 쫓기는 형국이었다. 석 과장의 진급이 특별히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박 차장과 비교를 당하기가 싫어서 이직을 심각하게 고려한 적도 있었다.
“요새도 회사 통근버스 타고 다니냐?”
와인 바에 앉자마자 박 차장이 먼저 입을 연다.
“나야, 그렇지 뭐. 너는?”
“부장들도 차를 못 가지고 오게 하는데 나는 한 군데 구해서 차 몰고 다녀.”
석 과장은 생맥주집을 찾았으나 박 차장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와인 바를 고집했다. 석 과장은 잠시 주저했지만 박 차장이 이끄는 대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와인 바에 들어오기 전에 석 과장은 아내에게 늦는다고 전화를 했으나 박 차장을 만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적응하지 못하는 경희가 걱정이다.
“오늘은 술 약속이 있었는데 캔슬됐어. 오랜만이다, 마케팅 쪽은 재밌고?”
“나야 그렇지 뭐.”
“그나저나 와인은 뭐로 할까? 아, 언니! 아크엔젤 있나?”
“그건 여름에 드셔야 제맛이에요.”
미모의 여자 종업원이 박 차장의 말을 거든다. 석 과장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누가 모르나? 마누라한테 청혼할 때 먹었던 거란 말이야. 여기 촛불들도 많고 분위기가 되네. 있어, 없어?”
“카베르네 소비뇽과 시라즈 두 개가 있는데 뭐로 드릴까요?”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줘. 안주는 아무거나.”
“알겠습니다.”
석 과장은 박 차장의 거침없는 태도에 은근히 기가 죽는다.
“야, 내가 재미있는 작업 멘트 하나 알려줄까? 어디 가서 써먹어도 좋을 거야.”
“그래, 해봐.”
“지금 말한 아크엔젤에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시라즈라고 두 가지 품종이 있는데 각각 가브리엘과 미카엘의 얼굴이 라벨에 붙어 있어. 참, 니 마누라 이름이 뭐지?”
“박지영!”
“그래. 니 마누라랑 마주 앉아 와인을 마시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의 이름은 모두 남자입니다. 가브리엘과 미카엘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제가 여성의 이름인데 날개 없는 천사를 한 명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제 아내 박지영입니다. 어때, 죽이지?”
박 차장이 말을 마치자 와인을 들고 나타난 여성 종업원이 깔깔거리며 웃는다.
“이 언니가 왜 이렇게 웃어대. 남자들끼리만 모여서 술을 먹는 건 딱 두 가지 이유뿐이야. 뭔 줄 알아?”
“남자들끼리만 모여서 술을 먹는 이유가 두 가지뿐이라고요? 뭔데요?”
“남자들끼리만 모여서 술을 먹는 이유, 첫째는 머슴들이 들일을 끝내고 모여서 마시는 경우고, 둘째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비밀결사를 할 때야. 우리는 어느 쪽 같아?”
“어머, 농담도 잘하셔.”
종업원은 박 차장에게 눈을 흘기지만 싫지 않은 표정이다. 종업원이 주방 쪽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며 박 차장은 다시 입을 연다.
“그러나저러나 기획실 대리 놈이 오늘 퇴근하는데 이상한 말을 하더라.”
“이상한 말?”
“응. 마케팅 부서에서 어떤 꼴통이 똑같은 기획안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다섯 번이나 연거푸 냈는데, 그걸 사장이 승인했다는 거야? 들은 얘기 있어?”
석 과장은 말문이 막혀 잠시 경직되었다가 이내 픽 웃는다.
“그게 바로 나야.”
이번에는 박 차장이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말문이 막혔다.
“노, 농담하는 거지? 무슨 기획안인데? 스낵? 아이스크림? 신제품은 아직 없을 텐데.”
“조용히 좀 해라, 누가 듣겠다. 히말라야 기획안이야.”
“히말라야? 미쳤어, 미쳤어. 어쩐지 본사에다 히말라야 관련 자료를 요청하더라니. 너, 도대체 어쩌려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박 차장은 와인을 마시며 침묵을 지킨다. 석 과장도 딱히 할 말이 없어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석 과장은 차라리 삼겹살에 소주를 먹는 게 낳지 와인은 영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 회사 통근버스 타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 너는 비오는 월요일에도 통근버스를 타고 오더라. 야, 비오는 월요일에는 집에서 아무리 일찍 나와도 교통 혼잡 때문에 통근버스가 제시간에 도착하겠냐? 지각을 해도 그 버스를 타는 널 보고 내가 아주 질렸다. 니가 안 나타나서 혹시나 상사들이 찾을까봐 네 책상에다 내가 서류 풀어놓고 플러스펜 뚜껑을 열어서 올려놓은 거 기억하냐?”
“아, 니가 그랬구나.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너 때문에 돌겠다. 그 시간에 지하철 타고 왔으면 니가 우리 라만차그룹에서 제일 일찍 출근한 놈이었을 거다.”
“다 지난 얘길 뭐하러 하냐.”
“아이고, 그놈의 고슴도치 컨셉이라니.”
“너도 고슴도치 컨셉을 알아?”
“야, 신입사원 연수 때 외국인 강사가 했던 말이잖아. 세계 최고가 되는 일을 한다, 돈 되는 일을 한다, 깊이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런데 그 세 가지 원이 그리는 접점의 일을 한다. 여우처럼 이것저것 재지 않고 고슴도치가 공처럼 웅크려 방어하듯이 단순명료하게 밀고 간다. 틀려?”
“그래. 그때 들은 말인 것 같다. 요새는 가까운 시간의 기억은 잘 안 나고 오래된 시간의 기억은 새록새록 떠올라. 나도 나이를 먹었나봐.”
“그나저나 너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지금 그룹 사정도 좋지 않고 경제도 불황인데 이번에 실패하면 끝장이야, 임마.”
“하이 컨셉으로 가는 거지.”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불황을 넘는 힘은 하이 콘셉트밖에 없어. 오래전 신문 기사에서 봤는데 1991년 일본 아오모리현(懸)에 시련이 닥쳤다고 하더라. 수확을 코앞에 두고 태풍이 불었다는 거야. 태풍 때문에 90퍼센트의 사과가 떨어져 버려서 농민들은 슬픔과 절망에 빠졌다는 거야. 이때 한 농민이 침묵을 깨고 아이디어를 냈다는 거야.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떨어지지 않은 10퍼센트의 사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떨어지지 않은 사과’를 ‘떨어지지 않는 사과’로 만들어 수험생을 대상으로 ‘합격사과’를 만들어 팔면 승산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합격사과’는 보통 사과보다 10배나 비싼 가격에도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서 당시 일본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대. 이렇게 관점을 바꿔서 기능적인 가치 뒤에 숨어 있는 감성가치나 문화·예술적 가치들을 창조해 내는 것을 세계적인 석학 다니엘 핑크(Daniel Pink)는 ‘하이 콘셉트(High Concept)’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더라.”
“아, 그 새끼 입만 살아가지고……. 그래, 너나 거북선 열두 척으로 이순신 장군처럼 왜군들 다 때려 부셔라. 난 모르것다.”
석 과장은 오랜만에 유쾌하게 웃는다. 그러나 아무래도 와인보다는 삼겹살에 소주를 들이키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고 생각한다. 와인 바에 듬성듬성 켜있는 촛불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어둠은 맞서 싸울수록 우리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할 뿐이다. 어둠에 맞서 총칼을 드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총칼대신 촛불 하나로 족한 법이다. 석 과장은 어둠을 몰아내는 촛불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야 한다고 다짐한다. 가슴에 작은 촛불을 켜라.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2
선배님께.
저, 현웁니다. 실망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는 선배님의 답신 정말 감사합니다. 가볍게 와인을 한잔했더니 기분이 좋군요. 전에 말씀을 드렸던 기획안은 통과가 되었습니다. 5고초려가 통한 셈이지요. 고슴도치 콘셉트와 하이 콘셉트의 승리였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우선 <고슴도치 콘셉트>는 막말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고, 열정이 생기며, 더불어서 돈도 벌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내용입니다. 3가지가 다 겹쳐지는 접점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이 콘셉트>은 어려울 때 낙담하지 말고 관점을 바꿔서 또 다른 가치를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기능적인 가치 뒤에 숨어 있는 감성가치나 문화·예술적 가치들을 창조해 내는 것이 불황을 이기는 힘이라는 것이죠. 제가 너무 주제넘은 얘기만 했나요?
기획안은 고집을 부려 통과되었지만 앞으로의 일이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꿈과 비전을 세우라는 선배님의 말씀도 힘이 되는군요.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은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누구나 다 알지요. 그러나 확실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다진 사람은 소수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꿈과 비전을 세우되 저의 이 고민과 불안을 이기고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바꿔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겠지요.
죄송하지만 의지를 다진다는 의미에서 선배님께 자주자주 메일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매일매일 성공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되새기며 의심을 지워나가지 않는다면 저의 잠재의식에서는 제가 실패할 이유, 성공 못할 이유를 찾아서 들이댈 게 분명합니다. 모르긴 해도 제가 지금 제 자신의 가치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면 첫째, 최고가 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거나 둘째, 돈에 대한 보상이 전혀 없는 일을 하고 있거나 셋째, 열정을 불태울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저 돈에 이끌려 일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선배님,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이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아무런 결과를 얻을 수 없고, 나와 나의 삶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요. 이제, 행동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현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