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나이테가 늘수록 나무는 튼튼해진다
목차
프롤로그 숫자 5의 위험한 마술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1 / ‘5고초려’와 ‘5개월’의 힘
Part 1 생각이 행동을 바꾼다
스페인 무적함대의 보복침공 /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 작은 촛불을 켜라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2
Part 2 나이테가 늘수록 나무는 튼튼해진다
로버츠 등반대, 히말라야를 정복하다 / 오고초려, 다시 시작되다 / 하치의 충심도 생존의 문제였다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3
Part 3 행동은 습관을 만든다
삼겹살집의 도원결의 / 실행은 복리로 수익을 돌려준다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4
Part 4 미래에 대한 매력적인 그림을 그려라
직선도로와 우회도로 / 반응성 애착장애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5
Part 5 습관이 되어야 변화는 완성된다
살얼음판 위의 스케이팅 / 따또빠니를 위한 성공의 아침 / 닭들의 회의를 멈춰라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6
Part 6 습관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
물타기 작전 / 백야를 부르는 승리, 혹은 향수 /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7
에필로그 습관은 운명을 만든다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8
Part 2 나이테가 늘수록 나무는 튼튼해진다
로버츠 등반대, 히말라야를 정복하다
석 과장은 한 손에 서류뭉치를 든 채 조용원 소장실의 문 앞에 붙은 명찰을 눈으로 읽는다. 코리아라만차식품 중앙연구소 조용원 소장. 그는 문을 가볍게 노크한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는 다시 노크를 하려다가 슬그머니 문을 연다.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은 벽이고, 오른쪽은 투명한 유리벽이다. 맞은편 끝에는 비서가 앉는 데스크가 있는데 정작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유리벽 안쪽에는 조 소장의 책상이 보이는데 비어 있다. 책상을 배경으로 책꽂이가 늘어서 있고 여러 가지 원서로 된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책상 앞에는 손님용 탁자와 의자도 보인다.
“계세요, 계십니까?”
석 과장은 비서의 데스크 앞까지 천천히 다가간다. 아무런 대답도 인기척도 없다. 그러다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누군가의 말이 덤벼온다.
“어떻게 오셨죠?”
제복을 입은 여비서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봐도 눈에 띌 정도로 하얗고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미소를 짓고 있다. 여비서의 손에는 칫솔이 들려 있다.
“소장님 뵈러 왔는데요, 마케팅부 석 과장입니다.”
“아, 네. 소장님께 오신단 말씀 들었어요. 점심 약속이 길어져서 조금 늦으신대요. 들어가셔서 기다리세요. 차 한 잔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마셨습니다.”
석 과장은 유리문을 밀고 소장의 방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손님용 의자에 얌전히 앉는다. 책꽂이에는 영문으로 된 원서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고 보니 조 소장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에 석 과장은 지그시 입술을 깨문다.
잉글랜드 라만차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를 모두 분석해 본 결과 히말라야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역시 영국암센터로부터 인증마크를 획득한 것이었다. 절차는 매우 치밀했다. 제품을 출시하기 전부터 과학적 분석과 투자가 뒤따랐던 것이었다. 잉글랜드 라만차연구소에서는 음료 히말라야의 주요 성분인 개잎갈나무 종자의 막질에 항암 성분과 비만 체질을 개선하는 성분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고, 이를 근거로 영국암센터로부터 인증마크를 받아낸 것이었다. 음료의 명칭을 히말라야로 특허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경쟁 업체가 파고들어서 발생할 수 있는 법적 절차나 틈을 최대한 막은 상태에서 제품을 출시한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투명한 유리벽 밖으로 마침 조 소장이 현관을 들어서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석 과장은 벌떡 일어선다. 조 소장은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외투를 벗는다.
“앉게, 앉아. 얘기가 길어져서 늦었어. 미안하네. 이 비서, 귀한 손님 오셨는데 우째 차도 한 잔 안 줘?”
조 소장은 들어서기가 무섭게 석 과장이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인터폰을 누른 채 비서와 통화를 한다.
“아닙니다, 저도 지금 방금 왔습니다.”
“이 비서, 여기 따뜻한 걸로 차 두 잔만.”
“예, 알겠습니다.”
조 소장은 인터폰으로 통화를 마치고 탁자로 다가와 그때까지도 서 있는 석 과장을 의자에 눌러 앉힌다.
“잘 왔네, 잘 왔어.”
“일찍 찾아뵈려 했는데 그동안 이것저것 자료를 분석하느라 늦었습니다.”
“그래, 수고가 많아. 그러면 나한테 보여줄 자료도 있나?”
“예. 잉글랜드 라만차에서 보내온 웬만한 자료는 다 가지고 왔습니다만 이게 한 장으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석 과장은 들고 온 서류 뭉치 중에서 맨 위에 놓인 종이를 조 소장에게 내민다. 조 소장은 내민 서류를 받아들고 눈으로 읽는다. 잠시 침묵을 지키며 서류를 보던 조 소장이 이윽고 말문을 연다.
“히말라야는 기능성 음료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건 한국에서 과학적으로 입증해줄 단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때 마침 비서가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선다. 비서가 두 사람 앞에 찻잔을 놓는 동안 침묵이 흐른다. 따끈한 유자차다. 시큼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그러고 보니 석 과장은 이것저것 챙기느라 점심을 굶은 상태다. 비서가 밖으로 나가자 조 소장이 말문을 연다.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될까?”
“네?”
“과학적으로 규명을 하고 어떤 의학 단체로부터 인증 마크만 따내면 모든 게 다 일사천리로 풀려서 매출로 이어지겠느냔 말이야.”
“잘…… 될 겁니다.”
“이 친구 또 기죽었군. 자, 내 말을 잘 듣게. 자넨 지금 자전거를 탔고, 헬리콥터를 탔단 말일세. 페달을 밟지 않으면 자전거는 옆으로 쓰러질 것이고, 프로펠러를 계속 돌리지 않으면 헬리콥터는 공중에서 떨어지고 말 거야. 지금의 상황과 진실을 냉혹하게 판단해보란 말일세. 자네는 회사를 골탕 먹이려고 같은 안건을 다섯 번이나 낸 게 아니듯이 회사는 자네를 내쫓기 위한 명분을 얻자고 이번 일에 실패를 바라는 게 아니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
“내 말은 막연한 낙관은 금물이란 말일세. 처음부터 긍정적인 자네의 태도는 나쁘지 않았어. 문제는 낙관과 긍정은 분명 다르다는 것일세. 낙관은 눈앞에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막연히 세상을 밝게 보려는 것이고, 긍정은 현실의 어려움을 이기면서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란 말이야.”
“그러면…… 낙관은 외부의 변화를 기대하고, 긍정은 자기 내면의 변화를 시도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아. 나는 자네의 그런 면이 좋아. 무슨 말을 하면 금방 알아들어. 요즘 젊은 친구들 머리는 좋은데 아무리 말을 해도 말귀를 못 알아먹거든. 하하하. 농담일세.”
조 소장은 그리 우스운 말도 아닌데 자신의 말에 만족한 듯 큰 웃음을 터뜨린다. 석 과장은 조 소장도 어쩔 수 없이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구세대라는 생각이 들어 입맛이 쓰다.
“모르긴 해도 자네는 내가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꼰대쯤으로 보일 거야. 안 그런가?”
“아, 아닙니다.”
“자네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들어봤지?”
“네, 압니다. 월남전에서 8년간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스톡데일 장군얘기죠?”
“들어봤군. 스톡데일 장군이 풀려나서 한 인터뷰가 가장 인상에 남아. 포로수용소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낙관주의자들이었다는 말에 나도 충격을 받았거든.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거라고 믿는 포로들은 막상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절망에 빠졌을 거야. 물론 그들은 부활절과 추수감사절에는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고 그렇게 또 그 시간이 지나니 상심해서 죽더라는 말은 전율하게 만들더군. 결국, 현실을 냉혹하게 판단하라는 얘기가 아니겠나. 포로의 입장에서 본다면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가지 못할 것이니 그에 대비하라는 말이 수용소에서 더 오래 버티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히말라야가 인증마크를 쉽게 딸 수 없을 테니 그에 대비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자고.”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 정말 고지식하구먼. 알았네, 알았다고. 우선 인증 마크를 따는 게 우선이니까 성동격서를 하자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동격서요?”
“그래. 성동격서야. 점심시간에 누구를 좀 만나고 왔는데 요지부동이야. 내가 만나고 온 친구는 한국식품문화경영컨설팅의 이로운 실장인데 그 사람은 아무래도 자네가 맡아야겠어. 이 실장은 경영 카운슬러지만 식품 쪽 컨설팅을 전문적으로 해서 그런지 의사들하고 친분이 두텁고 특히 한국암예방재단의 사외 이사니까 성동격서로는 제격일 거야.”
조 소장은 지갑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더니 석 과장에게 내민다. 석 과장은 명함을 받자마자 함박웃음을 짓는다. 이로운 실장의 명함인 것이다.
“이 사람아, 아직 좋아하기는 일러. 그 친구는 의사도 아니고, 설령 그 친구가 인증마크를 따내기 위해 우리를 돕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사들이 다 그 친구를 배척할 게 분명해.”
“소장님,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 뿐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이제 달려갈 용기가 생겼습니다.”
석 과장은 진심으로 말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달려갈 용기가 생겼다? 양명학을 주창한 왕수인도 그렇게 말했지. 앎은 행함의 시작이요, 행함은 앎의 완성이라. 내가 오늘은 정말 꼰대 같지?”
“아까는 말씀을 못 드렸는데 솔직히 그렇습니다.”
석 과장이 그렇게 말하자 조 소장은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는다.
“잔소리를 한 번 더 하자면 지나친 완벽주의도 실행을 방해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핸드폰을 들고 뛰면서 생각해야지 사무실에 앉아 전화를 다 하고서 생각에 몰두하면 이미 늦어. 실행은 최선의 훈련 방법이고, 실행이라는 투자가 있어야 이익이 생기고, 습관이라는 수익구조가 생길 것 아닌가.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 실행해야 하는 이유는 자네 말처럼 용기와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서도 좋고, 무엇보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당장 안 하면 그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것이지. 자자, 나의 잔소리는 여기까지일세.”
“죄송하지만 자주 찾아와 못살게 굴겠습니다.”
“그러나저러나 이 밑에 적힌 내용은 뭔가? 영국에 스페인 무적함대의 보복침공이 있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이야? 지금 소설 쓰나?”
“아, 영국 일간지 신문에서 처음 보도해서 매우 시끄러웠던 내용으로 보입니다. 라만차 히말라야의 성공신화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친 영국에 대한 보복침공이라는 기사였는데요 어이없는 주장이지만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혹시, 아시는 내용이 있나 여쭤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아, 신문 보도사건을 말하는 것이로군. 난 또 무슨 내용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때 일은 소설 같았네.”
“들은 얘기가 있으십니까?”
“물론이야. 이때 사건은 정말 운이 좋았지만 로버츠등반대가 히말라야를 살렸고, 잉글랜드 라만차를 구했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황이 정말 심각했어. 거대 신문사와 신흥기업의 전쟁이었으니까. 보도가 나가자 잉글랜드 라만차에서는 정식으로 정정기사를 요청했어. 물론 기자 본인에게는 팩트가 아니라 패러디였다는 말을 구두로 듣기는 했어. 기사를 그따위로 써놓고 패러디 기사였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 그러면 정정기사를 내야 하는데 그러질 않는 거야. 그 신문사에서는 체면 때문이었겠지만 차일피일 미룰 뿐 정정기사를 내질 않았어. 공식적인 논평도 없었고. 그러다가 시민단체가 들고 일어섰는데 대기업이 신문사를 압박한다느니, 언론을 위협한다느니 말들이 많았어. 원래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논란에 휩싸이기만 해도 진실과는 상관없이 제품의 매출은 뚝뚝 떨어지게 마련이거든. 더 웃기는 것은 다른 신문사들이 언론 수호를 외치며 논쟁에 가세한 거야. 사실, 논쟁이랄 게 있었나? 신문사 쪽은 입 다물고 가만히 있고, 잉글랜드 라만차만 죽어라고 얻어터지는 꼴이었다니까.”
“로버츠 등반대는 또 무엇인가요?”
“거 왜 네팔의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안나푸르나라는 산이 있잖은가. 그게 한 8천 미터는 넘을 거야. 제1봉을 프랑스 등반대가 정복하는 바람에 2차 세계대전 이후 히말라야 등반 붐이 일어났다고 하거든. 1960년에 영국하고 네팔의 공동 팀인 로버츠 등반대가 제2봉을 정복했었다는 거야. 안나푸르나의 봉우리가 네 개인가, 다섯 개인가 그렇지 아마. 그런데 정말 드라마 같은 일이 생겨버렸어. 때마침 영국의 암환자들로만 구성된 로버츠등반대라는 팀이 안나푸르나 제1봉을 정복했다는 기사와 사진이 각종 언론마다 대문짝만하게 보도됐거든. 그런데 놀랍게도 등반대원 중에 한 명이 우리 제품인 히말라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사진에 담긴 거라. 우리가 시킨 것도 아니고 지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래서요?”
“난리가 났어. 현지 마케팅팀에서 달려가 웃돈 주고 사진을 구해서 광고로 활용한 거야. 순식간이었어. 암환자들이 라만차의 히말라야를 들고 히말라야를 정복했다는 광고는 직방이었어. 적당히 애국주의를 자극했으니까 말이지. 매출은 쉴 새 없이 뛰었고, 잉글랜드 라만차로서는 전화위복이 되고 말았다니까. 그때부터 사장님의 별명이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된 거라고. 미디어라는 게 참 묘해요. 발목도 잡지만 풀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도 하더구먼. 사장님한테 직접 들은 얘기야.”
“그런 일이 있었군요. 재미있네요.”
“자, 그러면 우리도 한번 대차게 뛰어보세.”
“잘 알겠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또 찾아봬도 되죠?”
“물론.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모를까.”
석 과장은 조 소장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서 연구소의 방을 나선다.
오고초려, 다시 시작되다
“당신이 출근하고서 세 시간이나 쉬지 않고 울었다니까. 내가 팥쥐 엄마도 아니고 정말 미치겠어.”
“전화 좀 바꿔봐.”
“그럴 필요 없어. 내내 울다가 지금 잠들었어. 여보, 어떡하면 좋지?”
“글쎄. 지금 회사에서는 비상사태라 휴가도 낼 수 없고 걱정은 걱정이다.”
“석 과장님, 회의에 참석하랍니다.”
“지금 회의에 들어가야 하니까 조금 있다가 다시 통화하자.”
아내와 통화를 하다가 석 과장은 누군가의 말에 허둥지둥 전화를 끊는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마케팅 직원들이 모두 모여 있다. 석 과장이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김 부장의 타박이 이어진다.
“석 과장! 잉글랜드 라만차에 대한 분석보고서를 봤는데 영국에 스페인 무적함대의 보복침공이 있었다니 도대체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아, 그게 영국의 신문사 기자가 라만차 히말라야의 성공신화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친 영국에 대한 보복침공이라는 패러디 기사를 썼는데요, 그 당시에 상당한 타격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신문 기사가 팩트면 팩트지, 패러디 기사는 또 뭐냐? 어이, 이 대리 아는 얘기 있어?”
“그런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마케팅팀에서 알아서 해결했기 때문에 별일 아니었습니다.”
“석 과장, 별일 아니었다잖아. 이런 걸 분석보고서라고 내놓고 앞일이 캄캄하네. 인증 문제는 알아보고 있어?”
“예, 오후에 관계자를 만날 생각입니다.”
“뛰면서 생각해라. 생각하고서 뛰면 늦는다는 거 몰라? 지금 당장 나가봐.”
“예, 알겠습니다.”
석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김 부장의 말이 다시 뒤를 잇는다.
“아참, 발표할 게 있습니다. 우리 마케팅 부서의 이석우 대리가 영국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기획실 과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자, 축하해줍시다. 박수!”
직원들이 박수를 치자 이 대리가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한다. 석 과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주춤거린다.
“거기 뭐해? 빨리 나가보라니까.”
그제야 석 과장은 정신을 차리고 등을 돌려 회의실을 나선다. 석 과장은 걸으면서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마케팅팀에서 알아서 해결했다고? 이 대리는 로버츠 등반대의 존재를 알 터인데 숨기는 게 분명하다.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 거참, 개새끼네. 석 과장은 머리가 아파 머리를 좌우로 세게 흔든다. 아무래도 경희가 걱정이다. 아내가 못살게 구는 것도 아닌데 아이는 아내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경희는 석 과장이 집에 들어서면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석 과장의 양발을 벗겨주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잠들 때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유별난 아이의 행동은 파양의 후유증일까, 아니면 살갑지 못한 아내의 성격에 대한 거부반응일까.
석 과장은 걸으면서 조 소장이 건네준 명함을 꺼낸다. 번호를 확인한 후 핸드폰의 버튼을 누른다.
“안녕하세요, 이로운 실장님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디세요?”
“아, 저는 라만차식품의 석현우 과장입니다. 잠시 찾아뵙고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라만차식품이요? 거참, 그렇게 설명을 했으면 말귀를 알아들어야지 조 선배도 노인네가 다 됐구먼. 이거 보세요, 나는 할 말이 없으니까 오지 마세요.”
핸드폰이 뚝 끊긴다. 석 과장은 놀라 걸음을 멈췄다. 어떡하면 좋을까. 겁이 덜컥 난다. 명함에는 주소가 있다. 찾아오지 말라는데 무턱대고 찾아간다면 이 실장은 화를 낼 게 분명하다. 석 과장은 잠시 망설인다. 그때 핸드폰이 울린다. 석 과장은 핸드폰의 액정화면에서 발신자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여보, 난데. 얘가 이불에 오줌을 쌌어. 네 살짜리가 이불에 오줌을 싼다는 게 말이나 돼?”
“야! 네 살짜리가 오줌을 쌀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웬 호들갑이야? 내가 회의에 들어간다는 말 했어, 안 했어? 바쁘니까 끊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석 과장은 핸드폰을 팽개치고 싶은 심정이다. 씩씩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니 한쪽에 벤치가 보인다. 그는 그곳으로 걸어가 앉는다. 여기서 물러나면 끝장이다. 히말라야 기획안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석 과장 본인의 장래는 물론이고, 아내와 아이의 미래도 암담해질 것이다. 매달 나오는 대출 이자도 갚아야 하고, 아내 모르게 융자를 받아 시골의 부모님께 부친 비용도 이달부터 이자를 내야 한다. 그러저러한 내막을 알 리가 없는 아내로서는 투정을 부릴 수밖에 없다. 아내는 아내 앞에 있는 현실이 가장 치열할 뿐이다. 그가 그 앞에 있는 현실이 가장 치열하듯이.
석 과장은 일단 부딪치자고 다짐한다. 부딪치면 성공 아니면 실패다. 가만히 있으면 보나마나 실패다. 지금 당장 이 실장을 만나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경우의 수를 높여야 한다. 한 번 시도하는 것과 열 번을 시도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성공한 사람은 비범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끈기 있게 실행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말을 어디서 들었지?
석 과장은 벌떡 일어선다. 회사 정문 앞까지 단숨에 달린다. 그는 마침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손을 흔들어 세운다. 택시에 올라탄 석 과장은 다급하게 외친다.
“종로구 사간동까지 20분 안에 가주십시오.”
석 과장의 말에 반사경으로 택시운전사가 뜨악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인다. 석 과장은 택시운전사의 눈길을 애써 외면한다.
“조 소장님, 소개로 찾아온 라만차 석 과장입니다. 이 근처에 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석 과장이 한국식품문화경영컨설팅에 도착한 것은 25분만이다. 이로운 실장과 마주한 것은 통화한 지 30분 만에 이루어진 셈이다. 이 실장은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과는 판이하게 얼굴로 보나 커다란 덩치로 보나 조직폭력배를 닮아 있다. 조 소장의 소개로 왔다는 말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이 실장의 완강한 태도가 다소 누그러진 느낌이 든다.
“돌겠네. 석 과장님,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난 이번 일에 협조할 수 없습니다. 인증 마크를 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내가 당신들을 돕는다는 것을 의사들이 알면 난 이 업종에서 퇴출이야.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만 가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석 과장이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자 이 실장은 다소 놀라는 눈치다. 석 과장은 미련 없이 사무실을 나선다. 오고초려가 다시 시작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걸음걸이에 힘이 실린다.
*
“네팔 코리아 대표 시토 박입니다. 잉글랜드가 아니라 코리아 라만차에서 만나자고 하셔서 좀 놀랐습니다.”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VIP룸에 들어선 사내가 명함을 내민다. 석 과장은 명함을 받은 후 그에게도 명함을 내밀며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한다. 시토 박은 네팔에 거주하는 교포라고 들었기 때문에 차림새가 촌스럽거나 말투도 어눌할 걸로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 밖이다.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고, 세련된 외모다.
“마케팅부 석현우 과장입니다. 바쁘실 텐데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항공편은 어떤 편입니까?”
“오는 거요, 가는 거요?”
“아, 여기서 가는 것은 어떤가요?”
“홍콩 경유가 있고, 방콕을 경유해서 가는 거 두 가지에요. 홍콩에서 카투만두까지는 주 3회고, 방콕에서 카투만두까지는 주 4회죠. 가는데 복잡하기는 해요. 그나저나 코리아 라만차에서 저와 만날 일이 없을 걸로 알았는데 무슨 일이죠? 히말라야를 다시 팔기라도 할 건가요?”
“네,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허허허. 나야 좋지만 이미 실패로 끝났는데 승산이 있을까요?”
“원료는 충분합니까?”
“물론입니다. 영국과 유럽 쪽은 제외하더라도 앞으로 30년은 충분할 겁니다.”
“원료가 개잎깔나무 종자라고 했나요?”
“영어로는 히말라야시다(Hymalaya cedar)라고 부르죠. 우리나라로 치면 소나무에 불과한데 종자에는 얇은 종이처럼 반투명한 막질(膜質)의 넓은 날개가 있죠. 그게 주원료에요.”
“듣긴 했지만 직접 보질 못해서 실감이 나질 않는군요.”
“하도 대외비를 강조해서 직원을 보낼까 하다가 제가 직접 왔습니다. 여기 올 때까지 전혀 몰랐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작년에 안 돼서 중단했잖습니까?”
“그렇게 됐네요.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있습니다. 로버츠 등반대라고 들어보셨나요?”
“로버츠 등반대요? 모르겠는데요.”
“영국의 암환자들이 등반대를 구성해서 안나푸르나 제1봉을 정복한 적이 있답니다. 그때 한 등반대원이 우리 제품을 들고 있었다는데 그런 말 못 들어 보셨나요?”
“글쎄요. 처음 듣는 얘긴데요.”
“아, 그래요. 그러면…… 한국 사람들이, 아니면 의사나 정부 당국자가 네팔에 가면 히말라야시다(Hymalaya cedar)에 대한 채취 과정이나 뭐 이런 것을 볼만한 장소가 있을까요?”
“글쎄요. 히말라야시다는 히말라야산맥 서부나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주로 분포하기 때문에 특별한 장소는 없어요. 히말라야산맥이야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요.”
“제가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 방향은 암과 비만을 예방하는 실증적인 그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네팔에 가면 우리 음료 히말라야를 마셔야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막말로 네팔에 가면 네팔녹차 밭을 떠올릴 수 있는 장소 같은 게 없습니까? 그런 비슷한 거라도 없을까요?”
“아이고, 찾아는 보겠습니다만 어려운 일이로군요. 김 부장님을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룸에서 나가시자마자 왼쪽으로 꺾어지시고 복도 끝에 있는 사무실이 마케팅부입니다. 지금 계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네팔에 가기 전에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시토 박은 서로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룸을 빠져나간다. 석 과장도 지체하지 않고 룸을 나선다. 오늘은 두 번째로 이로운 실장을 찾아갈 생각이다. 이 실장의 도움 없이는 성동격서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통념상 음료를 특정 기능성 식품으로 인증받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실험한 결과나 자료를 제출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공인된 기관에서 새롭게 인증을 받지 못한다면 소비자의 거부감만 불러일으킬 게 뻔하다.
석 과장은 회사 정문 앞에서 택시를 잡아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리에는 따스한 햇살이 가득하다. 그는 속이 타서 죽을 지경이다. 계속되는 야근 때문에 온몸이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기어들어가 아무 짓도 안 하고 한 10년 동안 잠만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틈만 나면 전화를 해오던 아내도 이젠 며칠째 잠잠하다. 경희는 처음 이불에 오줌을 싼 날 이후로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줌을 싸고 있다. 입양한 첫날부터 줄곧 그래왔다면 야뇨증을 의심해서라도 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했을 터였다. 그러나 아내만 탓할 문제도 아니었고, 아이의 고의성도 다분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내의 표현을 빌자면 아이의 반항인 셈이다. 그렇다고 석 과장이 회사를 때려치우고 집에 들어앉아 아이를 돌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야말로 아이의 분리불안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로운 실장을 만나봐야 사실 할 말도 없다. 그냥 부딪쳐 보는 셈이다. 마땅한 의사를 만나 직접 공략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조 소장의 말대로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친다'는 의미의 성동격서가 적당해 보인다. 만약 의사협회나 단체가 대기업의 인증을 위해 돈을 받고 움직였다면 소비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결국 의사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실장을 끌어들여야 하고, 동쪽을 쳐들어가는 척하면서 상대를 교란시켜 실제로는 서쪽을 공격하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이 실장이다. 그는 식품회사의 경영 컨설팅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말대로 이번 문제는 그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일이 잘 풀리면 그에게도 상당한 혜택이 돌아가겠지만 일을 그르칠 경우 그는 그의 업종에서 퇴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장님 지금 외근 중이신데요. 오늘 못 들어오신다고 말씀하시고 나가셨어요.”
비서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석 과장은 예상이라도 한 듯 라만차식품에서 만든 과일 음료 한 박스와 명함을 한 장 내민다.
“실장님 들어오시면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아, 그리고 이건 직원들 출출하실 텐데 좀 드세요.”
석 과장은 라만차식품 계열의 제과점에서 종류별로 다양하게 구입한 빵 봉지를 내민다.
“어머, 이런 거 받으면 실장님께 혼나요.”
정작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서는 싫지 않은 기색이다.
“실장님께는 비밀로 하면 되죠, 뭐. 갑니다.”
석 과장은 잡힐 새라 컨설팅 사무실을 급히 나선다. 앞으로 이곳에 몇 번을 더 오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그러자면 컨설팅 사무실의 직원들과 얼굴이라도 익혀둘 필요가 있다. 정색하고 따질 필요는 없겠지만 이 또한 성동격서다. 직원들과 친해진다면 어쨌거나 이 실장에게 한 발 더 다가가는 것이 될 것이다. 계속 부딪치다 보면 시간과 세상의 이치가 나머지를 완성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건물을 나서자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이 쏟아진다.
하치의 충심도 생존의 문제였다
“이 실장은 여전히 반응이 없나?”
“예. 일주일에 한 번씩 네 번을 찾아갔는데 이젠 아주 만나주시지도 않습니다.”
“거참, 생각보다 완강하네. 어쩔 셈인가?”
조 소장이 근심 어린 눈길을 보내오자 석 과장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입에서 엉뚱한 말이 뛰쳐나온다.
“이번에는 열 번은 채울 생각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긍정적인 생각을 실행하면 긍정적인 실행을 낳겠죠.”
“자네 성격도 참 어지간하이.”
조 소장은 혀를 끌끌 찬다. 석 과장은 웃으면서 한손으로는 머리를 긁적거린다. 이제는 이 실장을 포기하고 싶다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가 저절로 내려간다.
“참, 네팔 코리아 박 대표가 왔다갔다면서?”
“한 일주일 됐습니다. 한 번 더 저를 만나고 가겠다더니 연락도 없이 네팔로 가버렸네요.”
“네팔에서 떵떵거리고 산다더군. 그 친구는 로컬만 하는 사람인데 왜 불렀어. 무슨 속셈이야?”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만 일이 진척되면 네팔 방문단을 만들어서 정기 투어를 만들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의사들이나 정부 쪽 정책 담당자들을 그쪽으로 끌고 갈 수만 있다면 유리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마땅한 볼거리가 없어요. 관광만 시키는 것으로는 뭔가 꺼림칙합니다.”
“동감일세. 히말라야 원료를 추출하는 장소나 시설이 있다면 좋겠지. 유난히 암에 잘 걸리지 않는 사람들만 모여 사는 집성촌이나 살찌지 않은 사람들만 모여 사는 부락이 있다면 더 좋겠고.”
“아, 제가 바라는 게 바로 그겁니다. 그렇다면 암과 비만을 예방하는 히말라야시다에 대한 연구논문이나 자료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울까요?”
“맞아. 내 생각과 비슷하군. 그러면 이렇게 하세. 나는 히말라야 원료가 암과 비만을 예방한다는 직접적인 논문이나 자료를 구해볼 테니 자네는 어떻게든 네발에서 히말라야 음료를 연상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게.”
“알겠습니다. 소장님과는 통하는 게 많아 좋습니다.”
“그나저나 자네 얼굴이 말이 아니네. 와이프한테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달라고 해.”
“저…… 개인적인 일인데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인데?”
석 과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양한 아이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아이의 집착과 아내의 우울증, 두 달간 거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횟수가 줄어들기는 했으나 아이가 이불에 오줌을 싸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까지도. 조 소장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다. 사생활에 관련된 일이라 조심스러운 모양이다.
“나도 이런 일에는 경험이 없어서 난감하네. 일단 입양기관과 상담을 해보고 필요하다면 어린이 교육 전문 단체 같은 곳에도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것도 좋겠지. 내 생각이네만 두 사람의 역할을 바꿔보면 어떨까?”
“역할을 바꾸다니요?”
“보아하니 자네는 아이에게 너그럽고 관대하며 무턱대고 감싸는 역할이 아닌가. 자네 와이프는 아이에게 타이르고, 야단치고, 성질나면 소리치고, 꼬라지 나면 때릴 수도 있는 역할이 아닌가 말이야.”
“그, 그렇긴 하죠.”
“그러니 자네는 아이에게 엄하면서도 냉정하게 대하고, 자네 와이프는 일부로라도 아이를 감싸는 역할을 해보란 말일세.”
“일리가 있는 말씀이로군요. 감사합니다.”
“안팎으로 바람 잘 날 없구먼.”
“뭘요. 또 들르겠습니다.”
석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 소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선다. 그는 사무실에 들를까, 아니면 이 실장의 사무실로 곧장 갈까 잠시 고민한다. 이 실장은 오늘도 만나주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에 컨설팅 사무실 직원들과 눈도장만 찍고 오자는 생각이 앞선다. 석 과장은 방향을 바꾸어 회사 정문을 향해 걷는다. 그는 정문 앞에서 택시를 잡아탄다.
차창 밖의 도시는 한산하고 한가하다. 이 실장을 찾아간들 오늘이라고 해서 특별할 게 있을까. 만나게 되면 무슨 이야기부터 할 것이며, 어떻게 이야기할까. 그러고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더 고민스럽다. 이 실장의 태도나 덩치로 보아 말을 잘못 섞었다가는 주먹이 날아올지도 모른다. 성경에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얘기가 적혀 있다고 들은 것 같다. 아무리 새롭고 독창적인 것일지라도 예전의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지는 못하는 법이다. 히말라야도 마찬가지다. 늘 마시는 물에 기능성을 첨가한 것에 불과한 셈이다. 영화나 소설이나 노래도 마찬가지다.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 <반지의 제왕>에 대해 팬들이나 비평가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감독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관해 모두 공감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이야기는 톨킨이라는 한 영국 소설가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아울러 톨킨의 소설은 북유럽 신화와 기독교 신화를 재해석하여 이야기의 줄거리로 삼았다. 뿐인가. 영화 <스타워즈>는 아더왕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았고, 영화 <매트릭스> 역시 성경과 불경을 비롯한 다양한 경전을 근거로 서사구조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게임, 영화, 드라마, 소설에서 전개되는 거대한 이야기들의 뿌리를 찾아보면 경전이나 신화, 고전, 소설, 동화 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신제품이 나오는 시대도 끝났다. 식음료, 가전제품, 자동차, 소모품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모델은 있으되 엄격한 의미에서 신제품을 찾을 수는 없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제품을 홍보할 때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의 시대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 것인가의 시대로 바뀌었다. 이제 똑같은 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의 시대인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어떻게 이야기를 하든 만나줘야 얘기라도 해볼 것이 아닌가.
석 과장은 핸드폰을 열고 포털 사이트를 연다. 대뜸 ‘충견이야기 : 하치의 진실과 생존의 문제’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일본에서 가장 훌륭한 충견을 뽑으라면 누구나 하치를 꼽는다. 하치 이야기는 일본에서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영화가 개봉되어 유명세를 치렀다. 충견 하치의 진실은 무엇이고 이를 통해 인간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먼저 영화 <하치 이야기>의 줄거리를 따라 가보자.
하치는 1923년 12월 아키다현 오타테에서 출생한 수컷이다. 털은 담황색이고, 짧은 양쪽 귀는 곧게 서있었으며, 꼬리는 말린 상태여서 우리나라의 진돗개를 연상시켰다. 하치는 이듬해 1월 동경 시부야에 사는 동경제국대학 교수 우에노 히데사부로에게 보내진다. 우에노 교수는 이 개를 숫자 ‘8’을 뜻하는 ‘하치’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우에노 교수는 하치를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키웠고 드디어 성견이 된다. 우에노 박사는 당시 동경 시부야에 살고 있었는데 제국대학 농학부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에 시부야 역에서 전차를 타거나 내리곤 했다. 하치는 매일 우에노 교수를 배웅하고 마중 나올 정도로 영리했다.
하치가 우에노 교수와 함께 산 지 1년 5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우에노 교수는 강의 중 돌연 쓰러져 급사하고 만다. 그런 불행을 알 리가 없는 하치는 언제나처럼 시부야 역으로 우에노 교수를 마중 나갔다. 그러나 교수는 밤이 늦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하치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시부야 역의 인파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우에노 교수를 기다렸다. 그렇게 하치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10년간 우에노 교수를 기다렸다.
하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사연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하치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그 미담을 영원히 남기고자 했다. 당시 실재로 일본 황실 예술인 안도테루에게 의뢰하였다고 한다. 1934년 4월 21일에 화려하게 동상제막식이 열렸고 바로 하치는 그 제막식의 주빈이었다. 생전에 동상으로까지 만들어진 하치도 다가오는 세월의 파도에는 이기지 못하고 수의사와 수많은 사람들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1935년 3월 8일 일생을 마감했다.
여기까지가 영화 <하치 이야기>의 기둥 줄거리다. 하치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잘 드러난 안타까운 내용이다. 그러나 충견 하치의 본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다. 하치는 충견도 아니고 우에노 교수를 그리워한 것도 아니며, 생존의 문제에 충실했을 뿐이다.
나는 시부야 근처에서 평생을 산 가와무라 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전에 할머니가 들려주신 얘기예요. 그 당시 할머니는 시부야역 앞에서 어묵 장사를 하셨지요. 하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곳에 와 어묵을 얻어먹었대요. 귀찮을 정도로요. 물론 다른 장사치들도 하치에게 여러 가지 음식을 주었대요. 하치는 배가 부른 다음에야 역 앞에 나가 우에노 교수를 기다리는 듯 얌전히 앉아 있더래요. 하치는 집에 머물러 있어봐야 뭐 하나 변변히 얻어먹을 형편이 아니었다는군요.”
개는 사람과 언제나 융화할 수 있어야 본질적으로 개다. 주인이 바뀌어도 아무렇지 않게 다른 주인과 화해를 해야 진정한 의미의 개다. 하치는 10년간 시부야역에 나가 우에노 교수를 기다렸다는 점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가 아니고, 어묵 가게에서 줄기차게 먹을 것을 얻어먹었다는 점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개다. 하치의 진실은 생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석 과장은 택시에서 내린다. 기사에서 충견 이야기를 읽고 나니 맥이 쭉 빠진다. 그는 옆구리 한쪽이 심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낀다. 갑자기 코끝이 뜨거워진다. 경희의 얼굴이 떠오른 까닭이다. 잠잘 때 석 과장의 한쪽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자는 아이. 아빠가 자신을 뿌리치고 출근했다는 이유로 3시간을 쉬지 않고 우는 아이. 어두운 방 안에 틀어박혀 아내의 눈길과 관심과 친절과 한숨과 야단과 심지어 눈물마저 외면하는 아이.
석 과장은 경희가 지금 충견 하치처럼 생존의 문제에 매달려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성격 때문에 두 번에 걸쳐 파양한 아픔이 있었고, 그의 마음만 사로잡으면 다시는 파양을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석 과장은 늘 아이를 감싸는 입장이었고, 아내는 늘 야단치는 입장이었다가 이제 그 역할을 바꾸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눈에 이슬이 맺혀 얼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청명한 날씨다.
장호원으로 보내는 메일 3
선배님께.
저, 현웁니다. 혹시,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들어보셨나요? 월남전 포로였던 스톡데일 장군이 8년 만에 풀려나서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낙관주의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낙관적인 생각으로 일관하다가 시시때때로 기대가 무너지면 금방 죽음에 이른다니 새겨볼만한 말이더군요.
회사에서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돌아버리겠습니다. 물론 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과 진실을 냉혹하게 판단해보고 있습니다. 낙관과 긍정은 분명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낙관은 스톡데일 장군의 지적처럼 눈앞에 있는 현실을 외면한 채 막연히 세상을 밝게 보려는 것이고, 긍정은 현실의 어려움을 이기면서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낙관은 외부의 변화를 기대하고, 긍정은 자기 내면의 변화를 시도한다는 의미겠지요.
행동하는 자여, 복이 있도다. 오늘 저는 유독 행동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결코 완벽주의자는 아닙니다만 지나친 완벽주의도 꼭 해야만 하는 행동을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 실행해야 하는 이유는 네 가지라고 하더군요. 첫째는 행동은 최선의 훈련 방법이고, 둘째는 행동이라는 투자가 있어야 이익이 생기고, 습관이라는 수익구조가 생긴다는 것이죠. 셋째는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서도 좋고, 넷째는 지금 해야 할 일을 당장 안 하면 그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너무 어려운 말만 하고 있나요?
선배님, 지금 프로젝트 건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훔쳐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물론 무턱대고 찾아가 부딪치고는 있지만 이 인간이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부딪치면 성공 아니면 실패, 둘 중에 하나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보나마나 실패죠. 그래서 한 번 시도하는 것과 열 번을 시도하는 것은 분명 다르겠죠. 성공한 사람은 비범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끈기 있게 실행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계속 부딪치다 보면 시간과 세상의 이치가 나머지를 완성해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성경에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얘기가 적혀 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새롭고 독창적인 것일지라도 예전의 기본적인 틀을 벗어나지는 못하는 법이겠죠.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사실 신제품이 나오는 시대도 끝났습니다. 식음료, 가전제품, 자동차, 소모품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모델은 있으되 엄격한 의미에서 신제품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제품을 홍보할 때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의 시대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 것인가의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똑같은 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의 시대인 것입니다.
사실, 오늘 메일을 드린 것은 입양한 딸 경희 때문입니다. 말을 좀 수정하죠. 오늘 메일을 드린 것은 제 딸 경희 때문입니다. 개는 사람과 언제나 융화할 수 있어야 본질적으로 개라는 말이 있더군요. 주인이 바뀌어도 아무렇지 않게 다른 주인과 화해해야 진정한 의미의 개라는 것이죠. 일본의 국견이라는 하치라고 들어보셨나요? 죽은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며 10년이나 시부야역에 나와 앉았다던 그 일본의 충견 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하치가 10년간 시부야역에 나가 우에노 교수를 기다렸다는 점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가 아니고, 어묵 가게에서 줄기차게 먹을 것을 얻어먹었다는 점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개라고 설명하더군요. 하치의 진실은 생존의 문제였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경희가 저에게 집착하는 것이 충견 하치처럼 생존의 문제에 매달려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미치겠습니다. 아이는 두 번이나 파양했고, 저의 마음만 사로잡으면 다시는 파양을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싸구려 감상주의에 빠져도 곤란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인 계산만 해도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일이든 인간관계든 현실을 냉혹하게 직시하되 인간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 태도가 무엇보다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 소식 전하지요.
현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