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시 어쩌다 신춘문예 | 2강 신춘문예 후일담
1차시 어쩌다 신춘문예
2강 신춘문예 후일담
1차시 2강 <신춘문예 후일담> 시간입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가슴이 설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현금이나 뭉칫돈을 받게 되면 가슴이 설렐까, 별로 놀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찬바람이 불면서 늦가을이 되면 가슴이 떨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바로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40전 41기의 한 소설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내가 쓰는 소설이 인류 최초의 소설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창조성이란 실로 ‘신의 역할을 대신하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를 말합니다. 소설가가 될 사람은 되고 되지 못할 사람은 못 됩니다. 이 말은 그 누구든 문자를 깨우치기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소설이다!’라고 당당히 써낸 뒤, 그것이 타인의 보편적 정서에 인정받기만 하면 되니까요. 간단합니다.
하지만 그런 예술가적 자존심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을 바치려는 각오가 우선 필요합니다. 그 누구든 자신의 인생 전부를 문학에 바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에 충실하기만 하면 곧 소설가가 될 수 있습니다.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되지 못한 사람은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진실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소심하고 유약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생각합니다.”
의미심장한 말이죠?
그 누구든 자신의 인생 전부를 문학에 바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에 충실하기만 하면 곧 소설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시길 바랍니다.
1) 쓰레기통에 들어갈 뻔한 등단작품들
등단의 절차를 거치기 위해 작품을 응모한 문학청년들은 초조한 기다림과 결과에 따른 실망으로 희비가 엇갈리게 마련입니다. 작품에 공을 들인 수고도 수고려니와 혹시 작품이 전달되지 않았는지 응모요령이 어긋나 불이익을 받은 것은 아닌지, 여러모로 걱정을 앞세우게 됩니다.
등단에 얽힌 사연들은 사실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가 박범신 씨의 경우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작품이 예심에서 떨어졌으나 당선작으로 마땅한 작품이 없자 담당 기자가 쓰레기통에서 극적으로 발견한 작품이 등단작 「여름의 잔해」였습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대개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으로 등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만 18세 때인 1933년에 「그 어머니의 부탁」 「서울로 가는 순이에게」 등을 《동아일보》에 기고하여 게재함으로써 청소년 때부터 필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소설가 최인호 작가의 경우 1963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단편 「벽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 작가는 ‘입선’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 계속 응모를 했으나 끊임없이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입대를 하게 되자 20여 편을 써서 투고를 했고 당선소감과 사진을 함께 보낸 치기까지 부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최 작가는 1967년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완벽한 등단이라는 숙원을 풀었습니다.
한편 2000년에 《한국일보》로 등단한 김종은 작가의 경우는 신춘문예 담당 기자를 애를 태운 경우입니다. 응모작품의 앞뒤에 주소와 연락처를 명기하는 것이 정상적인 응모요령인데 이를 지키지 않아 당선통지를 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작가의 사소한 실수로 담당 기자를 백방으로 뛰어다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2) 세계 대문호들의 데뷔작품들
그렇다면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요. 영국 작가 샬롯, 에밀리, 앤 등 브론테 세 자매는 각각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애그니스 그레이』 등을 발표하여 세계적 작가로 명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들 세 자매는 무명시절인 1854년 가을 큰언니 샬롯 브론테의 주도로 동생들과 함께 자비로 시집 《벨형제들의 시》를 출판했다고 합니다. 벨가의 남자 형제들인 것처럼 가명을 쓴 것은 당시 비평가들의 편견을 막아보기 위해서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집은 두 권만이 팔려나갔습니다.
『성』 『변신』 등으로 유명한 카프카는 생전에 독자나 비평가들로부터 단 한 번도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친구에게 “내 서랍에 있는 원고를 모두 불태워 달라”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습니다. 무명 작가가 사후에 작품성을 인정받아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여류시인으로 불리고 있는 에밀리 디킨슨은 철저하게 무명으로 은둔생활을 한 시인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발표한 7편의 시도 그녀 몰래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에밀리가 죽은 후에 그녀의 여동생이 자물쇠로 잠가놓은 한 상자 속에서 수백 편의 시를 발견하여 시집을 출간함으로써 위대한 시인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일약 스타가 된 경우입니다. ‘천재’와 ‘제2의 고골리’라는 찬사를 받으며 러시아 문단계를 일시에 뒤흔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가 태어나서 처음 쓴 소설이었다고 합니다.
3) 신춘문예의 무성한 막후 후일담
국내 신춘문예를 살펴보죠. 최인호 작가가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나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8세였습니다. 황석영 작가가 1962년 《사상계》로 입선한 나이는 19세였고, 김인숙 작가가 1983년 《조선일보》로 등단한 나이는 20세였습니다.
조해일 작가는 신춘문예 당선자 중 최고 낙방 기록 보유자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1962년부터 계속 신춘문예에 응모, 8차례 낙방의 고배를 마신 뒤 1970년에 가까스로 당선됐습니다. 팔전구기(八顚九起)인 셈입니다. <영자의 전성시대」 등 일련의 ‘창녀 소설’로 각광받은 조선작 작가도 신춘문예 단골 낙방생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1971년 종합 월간지 『세대』의 ‘신춘문예 선외(選外) 소설 공모’를 통해 결국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①중복투고, 표절 등으로 당선이 취소된 사례
그동안 동일작품 중복투고와 표절 등에 따른 당선 취소, 재등단 논란 등 신춘문예제도를 통해 야기된 문제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뒷이야기를 되새기는 것은 향후 신춘문예제도와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소중한 일입니다.
2003년도 《문화일보》 당선자로 발표됐던 O씨가 해당 인터넷신문에 게재된 것은 2002년 12월 31일 오후였습니다. 석간신문인 《문화일보》가 신춘문예 당선자를 제일 먼저 공개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O씨의 당선원고는 서울신문(당시 《대한매일》) 단편소설 부문의 작품평에 언급됨으로써 중복투고가 된 것이 공개되었으며, 이윽고 《문화일보》 측에서는 규정을 어긴 O씨의 당선을 취소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동일작품 중복투고의 경우 당선 취소에 대한 구제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신문사마다 신춘문예 작품공모를 할 때 이미 고지한 바가 있고, 규정을 어겼다면 취소돼야 마땅한 일이긴 합니다.
아울러 당선된 작품이 취소된 경우는 이번뿐만이 아닙니다. 특히, 《동아일보》 신춘문예는 권위를 인정받는 만큼 응모자들의 부주의 때문에 수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2002년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서는 당선자가 없는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사실은 당선자가 결정되었지만 해당 작품이 대학교 교내 문학상에 당선된 작품이었다는 게 통보 과정에서 밝혀져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윤효 작가는 1993년에 단편소설 부문의 당선자로 결정이 되었다가 취소되었습니다. 당사자의 말에 따르면 응모요령을 잘 몰라서 처음 쓴 소설 3편을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에 똑같이 응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D일보》에서만 당선 통지가 왔었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담당 기자가 타 신문사에 동일한 작품으로 중복투고를 했는지 확인하더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윤효 작가는 《경향신문》에 동일한 작품 3편을 응모했다고 말했으며, 신문사측에서는 바로 회의에 들어가 당선을 취소하고, 당선권에 올라 논의가 됐던 R씨의 작품을 가작으로 확정, 발표했으며 그 과정 또한 심사위원들이 심사평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당선이 취소됐던 윤효 작가는 그의 작품성을 눈여겨본 한 심사위원이 문예지에 추천하여 같은 해에 등단했으며, 현재는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90년 《동아일보》 단편소설 부문에서 가작으로 등단한 소설가 H 작가의 경우는 한때 문단의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H 작가 또한 응모요령을 제대로 몰랐는지 동일한 작품 한 편을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 대여섯 군데에 투고를 한 모양이었습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담당 K 기자는 단편소설 부문 가작으로 결정된 H 씨에게 입선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H 씨는 《동아일보》에서 동일한 작품으로 당선이 되었다는 통보를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통상 동시에 당선취소를 하게 되는데, 담당 K 기자가 이를 요구하자 《동아일보》 측에서는 해당 작품이 게재된 지면의 제작이 이미 끝나 난색을 표했다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두 신문사는 H 씨의 작품을 가작으로 발표하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H 씨가 《조선일보》의 편집국장과 문화부장 앞으로 “가작 수상을 거부한다”는 취지의 내용증명을 보내왔던 것입니다. H 씨는 “혹시 법적인 판단을 받을지도 몰라 최소한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라고 밝혔다는 것입니다. 이에 실망한 《조선일보》는 가작 결정을 취소하고 사건의 전모를 신문 지면에 고스란히 밝혀버렸습니다.
표절시비 때문에 당선이 취소된 것은 199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담당 기자가 밝힌 상황에 따르면 신춘문예 당선 발표가 끝난 후에 단편소설 부문의 심사를 맡았던 위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것입니다.
당선된 작품이 공개된 이후에 해당 심사위원은 중견 여성작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데 당선작이 자신의 작품을 상당 부분 인용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담당 기자는 중견 작가의 작품을 구해 당선작으로 발표된 작품과 면밀한 대조를 했으며, 표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고’를 통해 독자에게 사과하고 당선작 취소를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②심사위원의 불협화음
―합의 못해 공동 수상자 탄생
신문사 신춘문예의 초기에는 장르별로 공동 당선작을 뽑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처럼 장르별로 한 명만 뽑는 것은 1960년대 초반부터 정착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신춘문예의 당선작이 두 작품일 경우 십중팔구는 심사위원이 원만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서로 양보를 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롭게 신설된 중편소설 부문에서 이문열 작가의 「새하곡」과 이순 작가의 「부자 연습」은 공동 당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같은 신문 문학평론 부문에서 연세대 교수이자 평론가인 정과리 씨와 시인이자 평론가인 장석주 씨도 공동 수상자였습니다. 물론 심사위원들의 첨예한 대립이 공동수상자를 낳았다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였습니다.
1981년 《한국일보》 소설 부문에서는 황충상 작가의 단편 「무색계」와 이건숙 씨의 「양로원」이 공동수상을 했는데 이때 최종심사를 맡은 위원들은 김동리 작가와 최인훈 작가였습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문단계를 대표하는 작가들이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95년 《동아일보》 중편소설 부문에서 은희경 씨의 <이중주>와 전경린 씨의 <사막의 달>도 공동 수상작이었습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최종 심사위원의 견해는 각자가 당선작으로 추천하는 작품이 양분되었다는 것인데 합의를 이루지 못해 당선작을 내지 않는 것으로 기울었고, 신문사 측에서 공동당선을 제의해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당시 중편소설의 상금은 신춘문예 상금 중에서 최고액인 500만 원이었는데, 신문사는 하는 수 없이 평소와는 달리 두 사람에게 각각 지급해야만 했습니다.
③신춘문예, 문학이라는 그 열병의 뿌리
―이근배 시인, 임찬일 작가 등단 5관왕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등단한 문인 중에서 응모작품이 가장 많이 당선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에 5회에 걸쳐 당선된 이근배 시인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근배 시인은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주요 일간지 5개 신문의 신춘문예 시, 시조 부문을 휩쓸었습니다. 특히, 1961년 한 해에만 《경향신문》`《서울신문》`《한국일보》 등 3개 신춘문예에 각기 다른 작품으로 동시에 당선되어 주가를 올렸습니다. 1962년에는 《동아일보》 시조 부문에 당선되었고, 1964년에는 《조선일보》에 당선됨으로써 5관왕을 달성했습니다. 한 번의 당선도 어려운 마당에 5관왕에 올랐다는 것은 다른 응모자들에게 원성을 들을 법도 했으나 당시에는 동시 당선이 능력을 가늠하는 척도나 미덕처럼 여겨지던 상황이기도 합니다.
문형렬 작가는 197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됐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과 《매일신문》 소설 부문에 당선,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소설이 당선되어 4관왕에 올랐습니다.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 가작 입선한 강유정 교수는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문학평론 부문에도 각각 다른 작품으로 당선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이근배 시인이 1961년 가작 1편이 포함된 ‘신춘문예 3관왕’ 기록을 세운 후 44년 만이었습니다. 강 교수는 특히 2005년 《동아일보》 문학평론 부문에서도 두 작품이 겨루는 최종심까지 올라갔으나 아깝게 ‘동시 4관왕’의 대기록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신춘문예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면 임찬일 작가도 5관왕에 해당됩니다. 1986년 《월간문학》 소설 부문으로 등단한 임찬일 작가는 같은 해에 《중앙일보》 전국시조백일장 장원과 《스포츠서울》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되어 부문별 3관왕에 올랐습니다. 또한 1992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되었고, 1996년에는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어 소설, 시, 시조, 시나리오 등 문학의 주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웠으나 2001년 6월 간암으로 작고하여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창작집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간행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김도연 작가도 만만치 않은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춘문예를 폐지한 《중앙일보》에서 새롭게 마련한 2000년 중앙신인문학상 1회 공모에 당선한 김 작가는 1991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와 199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의 소설 부문에 당선되었으나 오랫동안 작품의 발표 지면을 얻지 못해 재등단의 절차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④재등단, 도약의 방편인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인가
―문인들 재조명 받고 싶은 욕망에 시달려
지방신문을 통해 등단을 해서 소외됐거나, 등단한 문예지가 폐간됐을 경우 해당 작가들은 발표 지면을 얻지 못해 재조명을 받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잘못을 떠나 문단계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중식이고 보면 등단한 작가가 재등단을 시도한다고 해서 사실 비난할 근거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문제는 다른 응모자가 등단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재등단 작가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인데, 사실 작가가 수적으로 많이 탄생해야 할 이유도 없고, 숫자는 적더라도 제대로 된 작가의 탄생을 기대하는 것이 한국 문단계의 발전을 위해 차라리 낫다는 게 중론입니다.
신춘문예를 통해 재등단의 절차를 거친 문인들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재등단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는 장르는 같지만 등단 매체를 바꿔 등단한 경우, 둘째는 아예 장르를 넘나드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장르는 같지만 등단 매체를 바꾼 경우는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나 1977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통해 다시 등단한 박기동 작가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최인호 작가의 경우도 1963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단편 <벽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되었는데,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응모하여, 당선됨으로써 재등단의 형식을 밟았습니다. 박기동 작가와 최인호 작가가 재등단한 시기나 상황은 2회 추천이 상례화된 당시 문단적 풍토와 결코 무관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등단의 매체도 늘어나고 더불어 독자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작가나 시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불어나 등단의 경쟁률이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재등단은 문학청년(이하 문청)들로서는 등단의 기회가 더욱 좁아지는 결과로 나타나 달갑지 않은 상황으로 인식하게 마련이었습니다.
⑤장르를 넘나드는 문인들
―시인이 소설가로 재등단한 경우가 많아
한편 장르를 바꿔 신춘문예를 통해 재등단한 경우는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특히, 시인이 소설가로 등단한 경우가 많았고, 반대로 소설가가 시인으로 재등단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신춘문예를 통해 시로 등단하고 나중에 다시 소설 부문에서 등단한 문인들로는 김승희, 정호승, 이병천, 문형렬, 이승하 작가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서강대 교수이자 시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던 김승희 작가는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그림 속의 물」이 당선되었고, 그 이후로 필명을 날렸으나, 21년이 지나 1994년 《동아일보》 단편소설 부문에 「산타페로 가는 사람」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습니다.
그리고 정호승 시인이 소설가로 등단한 것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정 시인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습니다. 등단 이후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등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던 그는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습니다.
중앙대 교수이자 시인으로 지명도가 높은 이승하 시인도 소설가로 등단했으나 이러한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는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화가 뭉크와 함께」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활약했으나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비망록」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소설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이병천 작가는 시로 먼저 등단했습니다. 1981년 《조선일보》 시 부문에 「우리의 숲에 놓인 몇 개의 덫에 대한 확인」이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고, 다음 해인 1982년 《경향신문》 소설 부문에 「더듬이의 혼」이 당선되었는데 이후로는 소설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특히, 앞서 얘기한 문형렬 작가의 경우에는 《매일신문》과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서만 각기 2개 장르에 걸쳐 등단했습니다. 《매일신문》 신춘문예에서는 동화(1975년)와 소설(1982년)이 당선되었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시(1982년)와 소설(1984년) 부문에서 당선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이나 소설가로 등단했다가 뒤늦게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가로 다시 등단한 문인으로는 남진우, 김이구, 정끝별 등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남진우 시인의 경우에는 1981년 《동아일보》 시 부문에 당선되었으며, 1983년에는 《중앙일보》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었는데 이후 시와 평론 활동을 병행해오고 있습니다. 정끝별 시인은 1988년 《문학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나 1994년 《동아일보》 문학평론 부문에 응모하여 당선됨으로써 평론가로 재등단했습니다.
김이구 문인의 경우에는 1988년 《문학의 시대》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했고,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었는데, “소설가가 왜 평론가로 등단했느냐”고 묻자 “하도 내 소설을 평론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내 소설을 평론하려고 재등단했다”고 말해 좌중의 폭소를 자아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하림 시인과 오탁번 시인이 동화작가로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것도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닙니다. 최하림 시인은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을 통해 등단했으며, 1965년 《동아일보》 동화 부문에 응모하여 당선되었습니다. 반면에 오탁번 시인은 1966년 《동아일보》 동화 부문으로 먼저 등단한 후, 1967년 《중앙일보》 시 부문에 당선되어 관심을 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