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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남편 김광석 Nov 03. 2016

정리되지 않은 이직소감문

비 온 뒤 맑음,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날씨

흐르지 않는 생각은 굳어버리고

 큰일이다. 『이김』을 유지하던 초심이 흔들렸다. 2주 전에 썼어야 할 이번 달 글을 이제야 쓰고 있다. 한 번도 밀리지 않았었는데 2주나 밀리다니. 초심이 흔들린 게 분명하다. 『이김』뿐 아니라 최근 6개월 동안 꾸준히 써오던 브런치 자체를 쓰지 못했다. 그런데 초심이 무너지거나 글을 쓰지 않은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글을 쓰지 않는 동안에도 글쓰기에 대한 생각은 계속됐다는 사실이다.


 회사 생활에 지치고, 이직을 준비하고, 새 직장에 첫 출근을 하는 와중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자신을 글쟁이라 부를 자격이 없지 않겠는가. 지난 2주 동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굴뚝 같았지만, 이직을 위해 최대한 많은 체력을 아껴두었다. 그 와중에도 머리를 비우기 위해 짧은 글귀들을 남기긴 했지만, 그런다고 정리될 생각은 아니었다. 오히려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던 생각들 사이에서 어설프게 몇 가닥 잡념이 빠져나오면서 생각의 시작과 끝이 얽히고설켜 모호해졌다.


<걸리우달> 김광석 2016


 흐르지 않는 물이 탁해지면 썩어 악취가 풍기듯 체력을 아껴두겠다는 핑계와 반대되게 머릿속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결국, 첫 출근에 긴장한 가운데서도 나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머릿속에 들어 있던 생각들이 너무 오랫동안 묵혀 있었나 보다. 한 가닥 한 가닥 생각을 끄집어낼 때마다 꽤 버겁다. 회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마음만 고생한 줄 알았는데, 머리가 한 고생도 여간 만만한 게 아닌가 보다.


비는 굳은 땅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오늘은 여러모로 비가 많이 내린 날이었다. 출근길에도 어설픈 비가 내렸고, 첫 출근을 한 사무실에서는 땀이 비 오듯 내렸으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퇴근길에는 우울한 비가 내렸다. 이쯤 되면 하늘에서 내린 비와 마음속에서 내린 비중에서 어떤 것이 하늘이고, 어떤 것이 땅인지 모호해진다. 생각의 시작과 끝이 모호하니 세상의 모든 것이 모호한 지경이다.

 모든 것이 모호한 가운데 우리 집 현관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머리도 마음도 하늘도 또렷해졌다. "아, 집이다. 바쁘고 정신없던 지난 며칠을 정리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들어서는데 어느새 정수리와 어깨를 툭툭 치던 빗줄기가 그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에 젖은 생쥐 모양으로 집 앞에 도착했는데, 야속한 하늘에는 별이 보인다.

 아, 때아닌 빗줄기에 고여있던 묵은 물은 빠져나가고 신선한 물이 공급된 것일까. 라이스페이퍼처럼 속이 비추는 구름 뒤편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니 뻑뻑하던 뒷목이 풀리고 웅크렸던 가슴도 펴지는 것 같다. 나는 불안했나 보다. 겨우 8개월 남짓 머물렀던 회사이지만, 6년을 내다보고 다녔던 회사였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떠나온 상황이 불안했나 보다. 무턱대고 뛰쳐나온 회사이지만, 혹여나 새로운 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어쩌나 불안했나 보다. 정말로 정말로 내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필요 없는 사람이면 어쩌나 불안했나 보다. 그랬던 마음이 오늘 내린 빗물에 씻기고 또 빗물을 머금어서 말랑말랑 풀렸나 보다.


비 온 뒤 맑음, 비가 내린 후에 보이는 별빛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멍하니 하늘을 봤다. 평소에도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던 나이지만, 비가 내린 직후에 하늘을 본 것은 몇 번 안 되었다. 돌이켜보면 항상 그랬는데, 비가 온 직후에 떠오르는 별빛은 유난히 반짝거렸는데, 아주 얇게 베어진 구름 속에 비추는 별빛은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보다 더 크게 보였는데, 나는 경험으로 알면서도 상식에 묻어버렸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그 강렬한 빛을 만나니 확신이 들었다. 밤하늘의 별.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에서 빛나는 별. 그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어디에 있을까.



 밤하늘을 밝히는 별빛은 밤에만 찾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비추고 있지만, 더 강렬한 태양 빛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다. 태양이 지고,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면 그래서 하늘의 민얼굴이 드러나면 화장 아래 가려졌던 주근깨처럼 쑥스러운 빛을 살며시 드러내는 것이다. 나의 꿈, 나의 미래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일상이라는 두껍고도 두꺼운 표피에 가려져 보이지 않다가 정말로 정말로 내가 원하는 순간에 '짠'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놓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음으로, 깊게 비추는 순간에 말이다.


 나는 다니던 회사를 나와서 꿈꾸던 회사의 '인턴'이 됐다. 겨우 3개월 남짓을 머물다가 나와야 하는 시한부 취업이다. 이러한 환경으로 나를 던지는 결정을 할 때, 나는 머릿속이 더 많이 복잡해질 줄 알았다. 오늘 내렸던 빗줄기는 앞으로 수개월 동안 외줄 위에서 버텨야 하는 나를 향한 눈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구름사이로 고개를 내민 별빛을 보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늘 그리고 내일, 앞으로 3개월, 내 일상은 장마가 온 듯 혹은 태풍이 부는 듯 거센 비바람이 몰아칠 것이지만 그 뒤에 반드시 떠오를 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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