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태양이 내게도 담겨 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어_ep6

by 라돌

어떤 아픔은 눈물이 흘러내려야 사라지고,

어떤 아픔은 서로 마주 안음으로 녹아내리고,

어떤 아픔은 돌처럼 굳어져 세월의 바람이 불어야 바스러진다.


상담 현장에 있다 보면 각기 다른 사연의 내담자를 만날 수 있다. 내담자의 사연의 내용만큼 다양한 아픔의 모양과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내게 떠올리면 가슴이 저릿한 사연이 몇 있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남는 사연 중의 하나는 어린아이의 사연이다.


나이가 십의 자리도 채우지 못한 어린아이가 엄마의 죽음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얼어붙은 마음으로 내게 왔었다. 나는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저 행동으로 눈빛으로 말로 안아주고 또 안아주었다.


아이가 상담에 왔을 때 많은 시간 분노했고, 울었고, 창피해했고 두려워했다. 회기가 진행되면서 아이의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감정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반가웠고 걱정되었고, 또 안도도 되었다.

그 아이와 상담을 하면서 그 작디작은 어린아이가 자신의 쓸모를 엄마의 죽음과 연결 짓는 것에 맘이 아렸다.

“엄마에게 내가 도움이 되는 아이였다면, 엄마가 그런 선택을 했을까요?”

“엄마의 선택에 나는 왜 고려되지 않았고, 엄마는 나를 두고 떠나갔을까요?”


아이가 당면한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며 많은 시간 화를 냈던 외침이다.

이 분노의 감정은 그림으로 만들기 활동으로 또 언어로 표현해 내며 아이는 힘겹게 상황을 이해하고자 버둥대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와 상담 장면에서 놀이를 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이 아이는 삼 년 여의 상담시간이 흐르자 점차 굳은 마음이 말랑해졌고, 편안하게 웃음을 지을 수 있게 되었고 본래의 명랑함이 차오르게 되었다.

이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자신의 쓸모를 존재의 이유와 연결 짓곤 한다.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산성 있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집단 무의식 같은 것이 어느새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누구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고, 초대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려면 나의 쓸모를 증명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


우리는 교육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짐짓 본인의 생산성과 쓸모의 중요성을 눈치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때부터,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런 집단 무의식적인 마음속의 외침이 크게 와닿게 된다.


요즘 사회는 특히나 더 자기 자신이 쓸모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찰 때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기 쉬운 사회인 것 같다.

그로 인해 본인이 존재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겨질 때가 되면, 안 좋은 선택을 하게 되기도 쉬운 환경인 것 같다.


나 역시도 종종 ‘쓸모’라는 주제로 마음이 쪼그라들 때가 있다. 특히나 휴직을 하고 시험관 시술이 고차수로 진입한 단계가 되니, 사회생활을 잠시 멈춘 기간이 길어지며 나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더욱이 시술에 필요한 약으로 인해 호르몬 조절이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약의 부작용으로 우울감이 높아질 때 어김없이 쓸모라는 주제가 슬며시 마음을 헤집어 놓기도 한다.

그럴 땐 의도적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무쓸모의 쓸모’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가 무엇인가를 생산해 내야만 나의 쓸모가 증명되는 것이 아니며, 가만히 보면 나의 존재도 증명해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내 의지로 이 세상에 난 것도 아니고, 다만 태어났기에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인데, 나의 연봉, 나의 근로의 생산성이 나의 존재 가치를 나타내는 수치도 아니며, 그걸 누가 측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난달, 비임신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잠시 무거워진 마음으로 가만히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아, 이번 달은 내가 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었던 걸 마음껏 하자!’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버스 안으로 엄청나게 밝은 태양의 빛이 들어왔다. 거의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빛이 강해 지금이 여름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유리창을 투과해 밝게 부서지는 태양을 온몸으로 느끼며, 따뜻함에 기분이 편안해지고 순간 포근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그저 이러한 상태라도 나는 신에게 빛을 받는 존재가 아닌가. 내 안에 이런 태양 빛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 말이다.


만일 마음속에 이런 빛을 가득 담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내리쬐진 빛을 알아볼 여유를 갖고, 자신의 주위를 그 빛으로 따뜻하게 비춰주면, 서로가 서로의 작은 태양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만났던 큰 슬픔을 겪은 그 아이에게 그 당시의 나는 눈이 부시게 밝은 태양이 되어줄 수는 없었지만, 함께 했던 작은 시간이 쌓여 아이 가슴에 따뜻한 빛의 조각이 남겨졌길 바라본다.


큰 태양을 반쪽 잃은 아이지만, 아이 주위에 좋은 어른과 친구들이 각각의 빛으로 반응해 준다면 분명 아이는 앞으로도 건강하게 자라날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 작년 연말 갑작스러운 참사에 마음을 많이 다친 유가족 분들에게도 멀리서나마 깊은 위로의 말씀을 조심스레 전해 드리고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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