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첫 수업은 이민자반에서 시작되었다. 이민자들은 스웨덴어 듣기 말하기 능력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눠졌다. 스웨덴에 온 지 5, 6년이 되었으면서도 생계에 바빠 말을 정식으로 배우지 못한 어른들이나 이민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쓰기와 읽기를 배우는 기초반으로 들어갔고 임마누엘과 같이 스웨덴에 온지 2, 3년 된 젊은이들은 중급반에 속했다. 나와 엠마는 이민자 중급반에서 수업을 받기로 배정되었다. 스웨덴어 회화에 능숙한 몇몇 이민자들은 고급반에 속했다.
우리반은 바르브로 선생님이 맡았는데 그분은 울라 교장선생님의 부인이라고 했다. 눈꼬리가 올라간 고양이 눈 모양의 검은테 안경에 비쩍 마른 얼굴이 일견 신경질적으로 보이나 이민자들에게 스웨덴어를 가르친 경험이 오래 되었는지 말이 느리고 발음이 분명하였다.
창문으로 교회당이 보이는 교실이었다. 창문 앞쪽에는 엘살바도르에서 이민 온지 5년이 되었다고 하는 18살의 루이스가 앉아 있었다. 그는 크고 새까만 눈에 속눈썹이 길었고 마치 돈키호테 소설 속 산쵸처럼 작고 탄탄한 몸에 사람 좋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말을 좀 우물 우물 속으로 씹는 듯 발음을 분명하게 하지를 못했지만, 알고 보니 눈을 내리 깔고 수줍은 듯 말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꼭 내뱉고야 마는 다혈질의 소년이었다.
루이스 옆에는 이란에서 온 페시만이라는 역시 키가 작은 23살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허벅지가 꽉 죄이는 청바지를 입고 셔츠 단추를 풀어 털이 거뭇거뭇한 앞가슴을 드러내고 위에는 검은 가죽 잠바를 입고 있었다. 원래 있던 학교에서 책상에 낙서를 했다는 이유로 쫓겨 났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그 역시 몹시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었으나 얼굴은 온통 수염자국으로 뒤 덮여 내 눈에는 좀 징그러운 인상이었다. 상대방을 바라볼 때 눈을 쏘아보고 수업시간에는 건들거리며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라크와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방공호에서 공습을 피하던 어린 시절의 두려움을 몸에서 떼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 언제나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는 폴란드에서 온 서른살의 알렉산드르가 앉아 있었다. 그는 중간 키에 탄탄한 체격을 가졌고 하늘색에 가까운 연한 파란색 눈에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이민 온지 십년이 되었는데 그 동안 마흔이 넘은 스웨덴 여자와 함께 살다 얼마 전 이혼했다고 했다. 좀 과장스레 시종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또 다른 사람은 빌마라고 하는 엘살바도르에서 온 30대 여자였다. 근 10년 넘게 엘살바도르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게릴라군과 정부군이 계속 대치해 있는 상황이어서 많은 엘살바도르인이 다른 나라로 망명을 했다고 한다. 빌마는 뚱뚱한 몸매에 내성적으로 보이는 얼굴에다 말할 때는 어딘지 모르게 어린 소녀와 같은 분위기를 풍겼는데 아들 하나가 있는 아줌마라고 했다.
중급반에는 엠마와 나뿐만 아니라 또 한명의 유학생이 있었다. 전날 저녁에 도착했다고 하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스무살의 대학생 마티아스였다. 그는 비엔나에서 북구문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스웨덴어는 2년 배웠다고 하는데 독일어와 스웨덴어는 같은 계통이어서인지 막힘이 없이 능숙하게 말을 했다. 동그란 테 안경을 끼고 약간 웨이브 진 윤기 나는 검은 머리에 다문 입매가 살짝 위로 올라가 어딘지 거만해 보이는 잘 생긴 얼굴이었다.
오후 3시쯤 수업이 끝나자 폴란드인 알렉산드르가 내게로 와서 물었다.
“오후에 할 일이 있어요?”
“아뇨, 없는데요.”
“그러면 국립자연공원이 근처에 있는데 같이 가볼래요?”
나는 그 사람이 정확히 어디 가자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승낙했다. 차를 타고 전날 안나와 임마누엘과 함께 갔던 길과 비슷해 보이는 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자 말이 이리저리 뛰어 노는 목장이 보이고 그 옆으로 바다가 보였다. 차에서 내려 걸어 들어간 곳은 바위가 울퉁불퉁 솟아난 사이로 파도가 철썩철썩 내리치는 해변가였다. 근처에는 크고 작은 바위섬들이 삐죽 삐죽 솟아 있었고 거친 바람에 파도가 심해 하얀 물가루를 맞으며 얘기를 하기 위해 목청을 한껏 높여야 했다.
“태권도를 할 줄 알아요?” 알렉산드르가 물었다.
“뭐라고요?”
“태권도요”
나는 그제서야 그 사람이 우리나라의 전통 무예인 태권도에 대해 물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본자세 밖에 몰라요.” 그냥 기본자세 앞지르기라고 들은 주먹뻗기 동작을 이얍 이얍 구호와 함께 흉내 내었다.
알렉산드르는 내가 b와 v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바위 아래 파도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앉아 그는 내게 b를 발음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했다. ‘바바밥밥밥’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내 발음을 교정하려 했으나 그때로서는 도무지 내 발음에 무슨 이상이 있는지조차 몰랐기에 정확히 시키는대로 발음할 수가 없었다. 그 후에도 줄곧 b와 v, f와 p, r과 l을 구별하지 못해 애를 먹었으나 이후 v, f, l을 발음할 땐 윗니로 아래 입술을 살짝 깨물 듯 해야 한다는 요령을 익혔다.
학교로 돌아와 보니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알렉산드르의 차가 떠난 후 교회 묘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에서 우리나라의 들꽃과는 다른 색다른 꽃들을 꺽어 학교로 돌아왔다.
백조
하늘도 그렇게 가끔은 쉬고 싶어
언덕을 베고 응시한다
바다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검푸른 영혼의 파도
눈이 깊숙히 열리는 날
부둣가의 젖은 길을 따라 걷다
세 마리의 백조를 만났다
나의 날들이 어둡지는 않어
바닷속 어딘가 어둠 안에서
빛으로 응결된 진주의 눈빛으로
나를 맞아주는 백조의 기다림
청동오리는
넘실대는 물결 앞에 주저하다
자맥질을 하고
바람에 몸을 맡긴 갈매기는
흰 헝겁조각처럼 떠돈다
백조의 날개는
가시풀의 옷을 얻어
지상으로 내려 앉고
옷과 손 그리고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살아있는 날들의 이미지가
젖은 소금 내음으로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