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선별하는 손
면책조항
본 글은 특정 단체·방송·인물·기관을 지칭하거나 비방할 의도가 없습니다.
여기서 다루는 ‘구조(rescue)’는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일반적 담론 형식을 지칭하며, 실제 사건이나 특정 단체와 무관합니다.
SNS에서 구조 영상을 본 적 있을 것이다.
지친 강아지가 구석에 웅크려 있고, 몇 분 뒤 누군가의 품에 안긴다. 며칠 지나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뛰노는 ‘행복한 모습’이 올라온다. 댓글에는 눈물 이모티콘과 “좋아요”, “공유”, “후원 완료”가 이어진다.
겉으로 보기에 ‘구조(rescue)’는 맑고 투명한 단어다. 위기에 처한 생명을 살려내는, 순수한 행위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 구조는 단순한 선행을 넘어 감정을 동원하고 후원을 이끄는 정치적 담론으로 작동한다.
구조 현장은 거의 예외 없이 기록된다. 이 기록은 두 얼굴을 지닌다. 한쪽은 ‘생명을 살린 증거’이고, 다른 한쪽은 ‘단체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광고’다. 여기서 구조는 단순한 구호 활동이 아니라, ‘감동 스토리’라는 상품으로 전환된다.
초췌했던 ‘전(before)’의 얼굴
회복한 ‘후(after)’의 미소
팔로워의 ‘좋아요’와 ‘공유’
이 변화는 후원금 모금에 있어 가장 강력한 마케팅 도구다. 구조 장면은 그 자체로 후원과 주목을 거래하는 화폐로 거듭난다.
구조된 동물은 더 이상 고통의 주체가 아니다. 감동의 매개물로 거듭난다. SNS에 등장하는 구조 서사 속 동물은, 고통에서 회복하는 과정과 그 변화를 통해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고, 후원자의 ‘선한 소비’를 정당화하는 아이콘이 된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누구를 구조할 것이며, 누가 그 결정을 내리는가?”
‘구조’란 말은 “이 생명은 살릴 가치가 있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생명은 구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버려짐의 선언이다. ‘죽여도 되는 생명’은 법과 윤리의 경계 밖에 밀려난다.
‘전쟁의 적군’, ‘사형수’와 ‘범죄자’, ‘질병으로 격리된 환자’, ‘식용 가축’과 ‘감정 없는 동물’
근대 국가와 제도는 이러한 경계선을 설정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해왔다. 구조자는 단순한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생명 분류자다. 그 손끝에서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고 이 분류는 개인의 선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플랫폼의 알고리즘, 후원 시장, 법·행정이 얽힌 장치(dispositif)가 ‘누가 살고, 누가 바깥에 남는지’를 함께 정한다.
후원자와 팔로워는 구조 소식을 보며 안도한다. ‘좋아요’를 누르고, 소액을 송금하며, 스스로를 “살리는 편”에 속한다고 믿는다. 이는 선함의 실천이자, 동시에 선함의 소비다. 구조 소식은 후원자에게 하나의 영수증이 된다.
“나는 좋은 일을 했다.”
“나는 옳은 쪽에 섰다.”
그러나 그 영수증의 뒷면에는, 구조받지 못한 존재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다만 그 뒷면은 접혀 있고, 결코 공개되지 않는다.
우리가 “불쌍하다”고 느끼는 존재는 구조되고, “징그럽다”거나 “더럽다”고 느끼는 존재는 외면된다. 강아지·고양이는 SNS에서 구조 서사의 주연이 된다. 그러나 돼지·닭·곤충은 감정의 무대에조차 오르지 못한다. 이것은 개인 취향이 아니다. 문화와 미디어가 오랫동안 주입해온 감정 훈육의 결과다. TV에서는 강아지 구조 다큐가 방영된다. 하지만 같은 시간, 치킨 광고는 닭을 ‘구조 대상’이 아니라 ‘소비 대상’으로 바꾼다. 어떤 생명은 눈물의 서사가 되고, 어떤 생명은 식탁의 이미지로만 남는다.
구조 서사가 주목하는 것은 살아남은 소수다. 그러나 그 카메라 바깥에는 수많은 비가시적 죽음이 놓여 있다. 그들은 이야기되지 않고, 기록되지 않으며,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구조란 언제나 선택된 이야기이며, 그 선택의 순간에 이미 수많은 생명이 은폐된다.
푸코는 근대 권력이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to make live and let die)”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했다. 이는 이전의 주권 권력이 “죽일 수 있고, 살려둘 수 있다”는 권리(to take life or let live)를 중심에 두었던 것과는 대비된다. 즉, 권력의 초점은 죽음을 다루는 데서, 삶을 관리하는 데로 이동했다.
그리고 오웰은 『1984』에서 사상 경찰 ‘오브라이언(O’Brien)’의 말을 통해 이렇게 적었다.
“Power is in tearing human minds to pieces and putting them together again in new shapes of your own choosing.”
— George Orwell, 1984 (O’Brien)
“권력이란, 사람의 마음을 조각내어 부수고,
네가 정한 모양으로 다시 조립하는 일이다.”
– 조지 오웰, 1984 (오브라이언), (필자 번역)
푸코가 말한 권력의 방식은, 오웰의 정의처럼 마음과 감정까지 재편한다.
구조를 말할 수 있는 자만이 구조를 기록할 수 있다.
이는 곧 살릴 생명과 죽일 생명을 분류하는 정치적 행위다.
구조(rescue)는 결코 중립적인 단어가 아니다. 그 안에는 생명을 선별하는 기준, 감정을 동원하는 코드, 후원과 이미지를 유지하는 전략이 동시에 작동한다. 그리고 ‘구조되었습니다’라는 말 뒤에는, 카메라 밖에서 사라진 수많은 존재들이 묻혀 있다.
우리가 구조 영상을 보며 안도할 때,
카메라 밖의 존재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당신이 보지 못한 그들의 이름은 누가 불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