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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해 Dec 05. 2017

10. 북유럽 디자인 기행을 마치며

We think too much and feel too little.

여행 후유증? 아무도 못 말린다는 유럽병? 이런 거 나는 없었다.

사실 나는 여행은 1년에 한두 번이면 족하고, 그게 꼭 해외여행일 필요도 없으며, 유럽에 로망이 크지 않았다. 만약 내게 주어진 시간이 일주일 정도였다면 나는 몽골을 갔을 거다. 2주 다녀와서 업무 팔로업을 해야 해서 바쁘기도 했고, 남자 친구랑은 너무 오래 떨어지는 기분이었고, 다음부터는 2주를 통째로 비우지는 말자고 다짐했을 뿐. 시차 적응도, 업무 적응도 너무 쉽게 빨리 했다. 사무실 내 자리에 앉자마자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다'라는 기분 좋은 안도감까지 느꼈다.


그럼 내가 이 여행이 별로 좋지 않았을까?

전혀. 정말 좋았다. 

내가 평소 못 보던 수준과 퀄리티의 제품을 시도 때도 없이 봤다. 분명 서울에도 좋은 게 많고, 오히려 더 좋은 것도 많다. 전혀 서울의 수준이 낮지 않지만 내 현실이 그렇지 않다. 하루의 12시간을 구로에서 보내고, 창업했다지만 똑같이 월급 받는 사장이라 펑펑 쓸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 어쩌면 일탈이 허용된 시간과 공간에서, 평소에 소비하지 못하는 것들을 마음껏 소비하고, 눈으로 사치하고 온 기분이었다.

디자인 기행이라는 컨셉 아래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냥 단순하게 '여행'이라는 것만으로도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이라는 점이 그랬고, 스트레스 없이 여유를 즐긴 것도 그랬다. 그래서 좋았다.

북유럽 기행 시리즈에는 적지 않았지만, 독일로 나간 언니와 몇년만에 며칠을 보냈다는 것도 나한테는 정말 행복이었다. 켈크하임 언니네 집에서 우리 조카 설현이.
디자인 기행 컨셉이라고 독일에서도 왠지 가야할 것 같았던 벤츠 박물관ㅋㅋ 형부 감사합니다.

여행은 좀 더 비싸고, 좀 더 생생하지만, 좀 더 얕은 '독서' 같다.

사실 여행을 한다고 대단한 새로운 관점이 생기거나, 내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거나, 없던 아이디어나 영감이 떠오르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간접 경험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 1년 전에 대림 미술관에서 핀 율 전시를 했었고, Hay 콜렉트샵은 서울에도 있다. 요즘 북유럽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책이나 다큐멘터리도 정말 많고, 유튜브만 해도 영상이 넘친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 여행은 '좀 더 비싸고 좀 더 생생한 독서'같은 느낌이랄까. 책의 장르도 굳이 따져보면 시대의 화두를 던지는 논픽션이나 고뇌하다 못해 허무하게 만드는 철학책 같은 것 말고, 가볍게 읽기 좋은 소설이나 에세이 같은 느낌이다. 나의 지식이 늘어나고, 추억할 거리가 생기고, 남들과 대화할 주제가 늘어난다는 공통점이 분명 있지만 오히려 사고 자체의 확장은 독서가 훨씬 좋은 것 같다. 단편적이지 않은 생각을 하게 하니까.


그래도 이번 여행이, 내가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일주일 이상을 쉬어본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험이기는 했다. 나는 항상 알바와 과외에 치여서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한 달 살이'였기 때문에, 뭘 하든 일단 2주를 쉰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감사한 경험인 것이다.

We think too much and feel too little.

학교 선배가 카톡 대화명에 적어놓은 말을 보고 기억에 담아둔 말이다. (본인은 모르심. 설 모 오빠 감사합니다.) 찾아보니 찰리 채플린이 한 말인데 전문을 가져와보았다.

“We think too much and feel too little. More than machinery, we need humanity; more than cleverness, we need kindness and gentleness. Without these qualities, life will be violent and all will be lost.”
- Charlie Chaplin

나는 저 문장을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감명 깊었다. 그리고 반추해보았다.


나는 확실히 느끼는(feel) 시간보다 생각하는(think) 시간이 많다.

많은 직장인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렇게 사는데, 나는 완전한 자의로 그렇게 산다. 이유는 간단하다. 손끝의 감각이나, 당장의 즐거움을 취하거나, 여유를 즐기면서 살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이 많지 않다. 내가 달성해야 하는 목표를 빠른 시간 내에 실행에 옮기려면 말이다.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희생하는 이 삶이 누군가에게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게 옳다고, 나에게 어울린다고 믿는다. 내가 생각하기엔 뭐 그렇게 대단한 희생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선택한 삶이고, 그게 즐겁다. 혹시나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이 시간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주변 친구들을 만나면, 가끔은 고립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다들 저 뭍에 있는데 나만 외딴 섬에 있는 것처럼. 그러나 내가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고, 내가 몸 담은 환경이 어딘지,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만큼 채워주는 사람들이 또 생기기 마련이니까. 섬 사람들도 있고, 섬을 스쳐 가는 뱃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내가 일하는 기계는 아니니까, 나에게도 'feel'의 시간 역시 중요하다.

내 업무의 대부분 - 어떻게 하면 비용을 낮출까, 일을 효율적으로 할까, 더 나은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까, 문제를 스마트하게 해결할까, 직원들에게 좋은 직장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 - 을 포함하여, 현실에서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 - 건강, 월급, 대출 등 - 와 관련된 무수한 고민들 말고도 정말, 정말 중요한 것들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족들을 만나러 일부러 시간을 내고, 친구들과 행복한 추억을 쌓고, 슬픈 영화에 눈물을 흘리고, 지나가다 문득 읽은 시에 감동을 받고, 예쁜 것을 보면 사진을 남기고,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깔깔대기도 하고, 가끔 내 생각을 글로 남기기도 하고, 사유할 수 있는 책을 읽기도 하고.

여행을 통해 '느끼는 것'에 몰입하기

이런 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고, 가장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여행의 묘미인 것 같다. 일에 몰두해서 사는 나 역시도 거의 유일하게 스위치를 끌 수 있는 시간이고, 온전히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니까. 덕분에 공기와 바람, 그 공간에서 웃고 웃는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아마도 북유럽에는 한국인을 포함해 아시안이 없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2주의 시간 동안 '느끼는 것'에 온전히, 충분히, 그 어느 때보다 몰입했다.


We think too much and feel too little.

고로 나는 위 문장에 아래와 같이 대답하면서,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좋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글을 마친다.


I can feel enough everything on the trip. That's why It's important to t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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