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영화관에서 영화가 보고 싶어 영화 예매 어플만 들락거렸다. 개봉 예정 작으로 <플래시(The Flash, 2023)>가 있는데, 이건 오늘(23.06.14) 개봉한다고 돼있었다. 그래서 어제(23.06.13) 뭘 볼까 하며 개봉 영화 목록을 보는데, 시사회로 <플래시>를 상영하는 영화관이 있어서 예매했다. (*영화 스포가 있습니다.)
<플래시>는 DC코믹스의 히어로이다. 플래시는 그 이름처럼 빛의 속도로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플래시가 초능력을 갖게 된 건 대학교 1학년 천둥번개 치는 날 밤. 실험실에 있던 주인공은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번개가 실험실의 시약에 들이치고 이 시약들이 주인공에 쏟아지면서 예의 그 능력이 생긴다. (실험실은 히어로가 생기기 좋은 장소인가 보다. 마블의 스파이더맨도 실험실에서 거미에 물린다.) 플래시는 빛의 속력보다도 빠르게 달릴 수도 있는데, 그럼 플래시는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 그래서 DC의 다른 영웅들; 날아다니면서 눈에서 레이저를 쏘고 (슈퍼맨), 슈퍼카와 최첨단 기술의 도움을 받고(배트맨), 아틀란티스의 제왕(아쿠아맨)에 비해 꿀리지 않는다.
플래시는 ‘빛의 속도’로 움직여서 세상을 구한다. 그러니까 붕괴되는 건물에서 추락하는 사람들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낚아챌 수는 있어도, 건물이 무너지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실은 이번 에피소드가 주인공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뛰는 바람에, 그러니까 과거로 돌아가는 바람에 문제가 꼬였다.
일전에 친구들한테 과거로 돌아가고 싶으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 물은 적이 있는데, 몇 명이 코인이 떡상하기 전이라 말했다. 이에 비하면 주인공은 순수하다. 플래시는 개인사를 바로 잡고 싶어 과거로 간다. 주위 사람들한테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굳이 코인이 아니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어떤 시점을 말하며, 이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다른 선택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일단 내 주위에는 전쟁과 테러 등 대의를 위해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한 게 아니다. 플래시 같은 슈퍼 히어로조차도 개인사 때문이었으니.
플래시는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의 자신과 평행 우주 속 빌런이 된 자신을 만난다. 어떤 세상에서 주인공은 영웅이지만 다른 우주에선 빌런이라. 영화 <버즈라이트이어(Lightyear,2022)>도 빌런인 저그는 주인공 버즈의 비뚤어진 자아였다. 다만 <버즈라이트이어>에선 영웅과 빌런이 동시대에 존재한다. 무엇이 히어로가 되고 빌런이 되는 걸 결정하는 걸까. 그 둘을 결정하는 단 하나의 지점이나 결정 같은 게 있을까. 아니면 수많은 결정들의 누적일까.
지난 3월에 개봉한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2022)> (이하 <에에올>), 이 영화도 평행우주와 관련 있다. 현실의 양자경은 중국계 미국인으로 세탁소를 운영하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히어로이다. 다른 세계에서는 영화배우, 요리사, 경극배우 그리고 돌멩이이다. 심지어 손가락이 핫도그인 세계에서는 동성애자이다. 현실의 양자경은 다른 우주 속 영화배우가 된 자신을 부러워한다. 영화배우가 된 자신은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을 때의 버전이다. 우리가 하는 수많은 선택이 각각의 수형도를 그리며 그 가지마다 저마다의 내가 있고, 그 우주가 있다라 너무 매력적인 이야기 아닌가.
평행 우주 속 수많은 나의 버전을 생각해 본다. 아이돌로 성공해 영화배우로 전향한 뒤 포르셰를 운전하는 나, 하와이에서 요가 강사를 하면서 주말에는 스킨 스쿠버를 하고 일요일 아침에 아사히볼을 먹는 나, 좋아하는 연예인이랑 결혼한 뒤 취미로 하는 꽃꽂이에 재능을 보여 플라워리스트가 된 나. 상상한 해도 너무 행복하잖아! 평행 우주 속 이런 내가 있다면 너무 부러워서 그들의 삶을 훔치고 싶지만, 그럴 권리가 내게 없다는 것 또한 잘 안다. 그 멋진 인생은 그들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버전의 내가 존재할 수 있음도. 중학생 때 아토피가 너무 심해서 학업을 중단한 나, 스위스에서 패러글라이딩하다 사고가 나서 하반신 마비가 된 나, 몇 년 동안 입시공부에 매달렸지만 결과적으로 합격하지 못 한 나. 또 다른 선택과 우연 속에서는 이런 나도 어느 차원에서 있을 수 있다. 이런 수억 가지의 내가 있다고 하면, 영화 <에에올>의 양자경이 영화배우가 된 자신을 부러워하듯 지금의 나를 부러워하는 버전의 나도 이 평행우주 속 어디에서인가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도 꽤 괜찮은 삶이지 않을까.
영화 <플래시>를 본 날, 영화관에서 집까지 걸어가며 여러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은가. 과거로 돌아가면 나비 효과 때문에 그 시점 이후로 모든 게 바뀔 텐데, 그 모든 걸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럼 그만한 비용을 치르지 않고 더 멋진 미래를 원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까.
인생은 실로 B와 D사이의 C이다.